가보지 않았기에 선명한 베니스, 『Venice Observed』

베니스에는 가본 적이 없다. 메리 맥카시의 베니스 관찰기』를 접하게 되고, 한 계절쯤 그 도시에서 살아본 듯한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어떤 장소는 직접 가보지 않아도, 좋은 문장을 따라 상상 속에서 충분히 살아볼 수 있다. 바로 이 책은 그런 마법을 보여준다.

가보지 않았기에 선명한 베니스, 『Venice Observed』

낭만과 고전 사이, 베니스라는 역설

내게 베니스는 늘 엽서 속 이미지였다. 푸른 운하와 반짝이는 곤돌라,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에 내려앉은 흰 비둘기 떼. 저자는 이런 인상들을 첫 장부터 정면에서 깨뜨려 버린다. 그녀는 베니스에 대해 쓰는 일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데, 모든 사람이 베니스에 대해 같은 말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조차도 베니스의 본질이라는 역설이 이 책의 시작이 된다.

“베니스는 누구에게나 같은 감정을 주는 도시다. 그 감정은 진부하지만, 동시에 진실하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마트폰에 담긴 여행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던 행동이 실은 표면만 훑고 지나간 기록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은 빛나는 순간만을 포착하지만, 맥카시의 문장에서는 그 도시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그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있다. 베니스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한 장의 낭만으로 소비되기보다는, 단어와 문장의 결을 따라가며 느껴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창문 하나가 만든 관찰자의 거리감

저자는 베니스의 거리를 걷는 것 보다,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녀가 머물던 팔라초의 창가에서 베니스를 일상처럼 소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에서 사유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직접 뛰어드는 대신 한 발 물러나 도시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식이 책의 전체적인 태도를 결정짓고 있다. 그래서 『베니스 관찰기』는 현장감 넘치기 보다, 도시에 대한 명상을 산문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녀는 운하의 표면에서 빛나는 윤슬의 아름다움에 더해, 그 아래에 흐르고 가라앉은 시간의 흔적과 인간의 흔들림에 더 주목하고 있다.

“시간이 도시의 피부에 침윤되어 있다”

이 문장은 단지 감성적인 수사라기 보다, 도시가 어떻게 퇴락을 견디고 그것마저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바꾸는지를 파헤친 문학적인 해석으로 느껴진다.

도시의 물질성과 윤리성

"전리품(The Loot)"이라는 장 제목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베니스는 자신을 꾸미기 위해 외부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끌어온 도시였다. 성 마르코 대성당의 모자이크, 동방에서 실려온 조각상, 그 모든 장식들이 본래 베니스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 도시를 복합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맥카시는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 치장은 허영이지만, 그 허영이 곧 진실이다.”

도시는 그렇게 자신을 ‘만든다’. 이 문장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도시가 사실은 ‘모조된 이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기게 했다. 베니스는 그 점을 잘 드러내는 장소로 표현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베니스, 상업과 감정의 도시

『베니스의 상인』에서 셰익스피어는 “살 한 파운드”를 계약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저자는 이 점을 물고 늘어지는데, 베니스는 낭만적인 도시가 아니고 계약과 계산, 물질과 감정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질문하게 되었다. 지금의 도시들은 솔직한가? 계약을 낭만으로 포장한 채 살아가는 현재의 도시에서, 실은 교묘하게 계산된 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되묻게 된다.

예술, 신앙, 그리고 틴토레토의 어두운 광휘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가 틴토레토를 다룬 장이다. 솔직히 그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베니스 관찰기』를 읽는 동안, 붓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맥카시는 틴토레토의 작업을 그의 예술이 내뿜는 강렬한 에너지와 종교적 광휘, 심지어는 혼돈에 가까운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그녀가 묘사하는 스쿠올라 디 산 로코의 벽면—빛과 어둠이 충돌하는 듯한 구도, 비틀린 인물들의 표정, 장면을 가득 채운 극적인 구도—는 한 장의 장면이 아니라 거대한 서사시처럼 느껴진다.

“그는 시간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시간을 찢는다.”

그 표현은 머릿속에 오래 붙잡게 되었다. 그의 그림이 어떻게 신성함과 인간적인 고통을 동시에 담았는지, 마치 내가 그 그림 앞에 선 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장소의 부재가 상상의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게 되었다.

시간의 도시, 쇠락의 품격

저자는 베니스가 무너지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본다. 도시는 매일 조금씩 가라앉고 있고, 건물의 기초는 물속에서 부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침몰을 단순한 소멸이나 퇴락으로 보지 않고, 이 도시가 붕괴되어 가는 모습에서 고요한 품격을 발견해 표현한다.

벽돌이 이끼로 덮이고, 운하의 돌기둥이 삭아내리는 그 흐름 속에서, 베니스는 끝까지 자신만의 얼굴을 지켜내고 있다고.

“베니스는 허물어지면서도 절대 자신을 잃지 않는다.”

도시뿐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오는 문장은, 사람은 모두 늙고, 사라지고, 지워지지만, 그 과정에서 어떻게 우아할 수 있을지? 아직 베니스에 가지 않았지만, 그 질문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독서라는 여행, 여행지를 마주하는 또 다른 방식

여행 문학이지만, 여권을 꺼낼 필요도 없이 베니스의 가장 깊숙한 골목을 걸었고, 곤돌라의 그림자 밑으로 가라앉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실제로 베니스를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의 베니스’가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멀리 있는 도시야말로 가까운 사유의 장소가 된다. 『베니스 관찰기』는 그런 장소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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