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도시를 거닐다 보면, 한적한 거리에서 번쩍이는 호텔 간판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 순간 나는 종종 상상한다. 저 안에선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벽 너머의 사람들은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할까. 김다영 작가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를 펼쳤을 때,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는 한 권의 여행을 만나게 된다. 익숙하게만 여겨졌던 호텔이라는 공간이, 이제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여행의 주인공으로 다가왔다.

호텔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호텔을 고르면, 여행의 중심이 달라진다

기존의 여행 계획은 대부분 이렇게 흘러간다. 도착지와 보고 싶은 장소를 먼저 정하고, 마지막에 '괜찮은 숙소'를 고른다. 그러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는 그 순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책에서는 “호텔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동의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몇 년 전, 베트남에서 우연히 예약하고 머물렀던 한 호이안의 고즈넉한 인테리어의 호텔에서 여행의 일정에서 숙소에서 머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화창한 날이었지만,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바깥 풍경이 은은히 흐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보낸 그 하루는 그 어떤 관광보다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호텔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는 장소”라고. 저자가 얘기한다. 이 문장 하나에 이 책의 모든 의미가 압축돼 있다.

여행의 키워드는 이제 ‘능동적 휴식’

무작정 쉬기 위한 여행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쉬는 여행’. 이 책은 그 개념을 다양한 호텔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다. 여행은 의무가 아닌 휴식과 새로움을 얻고자 하는 여정이다. 보통 여행을 하면서도 일정표에 묶이고, 구글맵에 의지하며 헤메다 그 시간마저 일처럼 보낸다. 책에서는 그런 여행의 틀을 부드럽게 흔든다.

“어메니티 하나, 침대 옆 조도, 로비의 음악”이 곧 나를 움직이게 한다고.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건, 하와이 라나이 섬의 포시즌스 호텔을 소개한 대목이다. '스트레스를 섬에 두고 오라'는 말이 마치 내 안의 피로를 콕 집어주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 책은 그런 위로를 호텔이라는 공간으로 전달해준다.

준비 없는 여행자의 호텔, 얼마나 고마운가

무계획 여행은 겁나는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낭만적인 시도로 보인다. Step 2에서는 준비 없이 떠난 여행자들을 위한 호텔들을 소개하는데, 이 장에서 '암바 호텔 타이베이 송산' 이야기에 큰 공감이 되었다. 호텔 로비에서 받은 한 장의 손그림 지도, 거기에 표시된 동네 빵집과 골목의 카페. 이 정보들은 오래된 친구가 알려준 비밀스런 장소 같이 느껴졌다. 호텔이 관광에 대한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이해하고 방문한 여행자의 시선을 열어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책에서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일본의 어느 호텔에서 받았던 작은 수첩, 거기엔 호텔 스태프가 직접 손으로 적은 ‘내가 사랑하는 도쿄’ 리스트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가이드에는 없는 영화 카페였다. 그곳에 앉아 따뜻한 차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지역 사람들의 일상을 지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말하는 호텔의 역할은 바로 그런 의미 인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잠깐이라도 삶의 리듬을 되찾게 해주는 장소로 말이다.

일과 쉼의 경계를 허무는 호텔들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 일과 여행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작가는 그런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데,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는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해야 할 때'를 위한 호텔들을 따로 소개한다. 버진 호텔 시카고, 클라리온 호텔 헬싱키 같은 공간들은 투숙객의 ‘생활 흐름’까지 배려한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구성인 것이다.

오전엔 로비의 커피 바에서 업무를 보고, 오후엔 호텔 내부 갤러리에서 산책을 하고, 저녁엔 도심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호텔의 ‘디자인’이 아니라 ‘기능’이 그렇게 지내게 만들어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기억이 왜 특별했는지 정확히 일깨워 준다.

도시를 가장 흥미롭게 경험하는 법

호텔을 통해 도시를 가장 창의적으로 체험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도 담겨있다. ‘도시를 체험하는 창’으로서의 호텔을 제안하는 것이다. 시드니의 QT 호텔, 멜버른의 더 블랙맨, 타이중의 레드닷 호텔처럼, 도시의 감성을 그대로 담은 호텔은 그 자체로 관광지다. “여기가 정말 중국 맞아?”라고 묻고 싶게 만드는 URBN 호텔 상하이처럼, 호텔이 도시의 고정된 이미지를 새롭게 바꿔줄 수 있다고 말한다.

호텔에 머물면서, 단 하루 만에 그 도시를 다시 보게 된 적이 있다. 호텔 로비에서 틀어주는 로컬 음악, 직원의 사투리가 섞인 영어, 객실 벽에 붙은 동네 예술가의 포스터 하나하나가 여행을 다시 쓰게 만들었다. 책에서는 이런 경험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조용히 붙잡아준다. 이 감각을 안다면, 더 이상 호텔은 ‘쉬러 가는 곳’이 아니다. 호텔은 ‘머물며 감각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호텔은 여행의 큐레이터다

호텔이 가지고 있는 실용성도 놓치지 않는다. OTA(온라인 예약 시스템)의 구조, 컨시어지 서비스의 활용법, 어메니티의 가치 등 호텔을 고르고, 경험하고, 즐기는 방법을 매우 세심하게 다룬다. 독자가 ‘왜 이 호텔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데 탁월한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호텔을 고를 때 무심히 지나쳤던 기준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독자로서의 마무리

나의 여행 습관에 작지만 결정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이제는 도시보다 호텔의 창밖 풍경을 먼저 상상해 보게 된다. 나를 위한 호텔, 나를 기다리는 호텔,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아갈지. 여행을 다시 디자인해주었다다. 그리고 그런 여행은, 삶을 조금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여행의 방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더 이상 익숙한 여행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호텔은 언제나 거기 있다. 다만, 당신이 아직 그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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