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누군가 길을 보여줬으면 했던 적이 있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이유 모를 공허함에 빠졌을 때 말이다.
체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의
『와일드(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는 그런 마음 속 갈피를 따라 걷는 이야기이다. 단순한 하이킹
여행기를 초월하여, 인생의 위기를 지나 다시 자신을 마주한 한 여성의 치열한 여정을
담고 있다
태평양의 분수령, 그 거대한 자연 속으로 미국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잇는 장거리 트레일 PCT(Pacific Crest Trail)는 총 길이 약 4,265km. 멕시코 국경을 시작해 캐나다에 이르는 이 험난한 산길은 사막과 설산, 숲, 강에 이르기까지 미국 서부 자연의 축소판으로 불릴 만큼 변화무쌍한 곳이다.
체릴 스트레이드는 1995년, 그 중 1,100마일(약 1,770km)을 걷기로 결심한다. 준비도 부족하고 하이킹 경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인생의 모든 짐을 등에 짊어지고 길위에 나섰다. 그녀는 PCT를 선택한 이유를 '길 위에서라도 자신을 되찾기 위해'라고 말한다
여정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었다. 고요하지만 치열한 내면의 사투이기도 했다. 하이킹은 그녀의 인생에 메타포처럼 스며들었다. 몸의 무게만큼이나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는 연습부터, 매일 걷는 수십 킬로미터는 그녀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이었고, 이 내용들은 새로운 날들에 대한 각오로 표현된다.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찾는가
이 책의 가장 큰 울림은 체릴이 떠난 여정의 '이유'에 있다. 젊은 나이에 엄마를 암으로 떠나 보내고, 체릴은 인생의 방향성을 잃게 된다. 가족은 흩어지고,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고, 방황 끝에 마약과 충동적인 선택들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실패와 후회로 가득 찬 시간의 긴 터널을 지나며, 더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 속에서 PCT를 떠올린다.
『와일드(Wild)』는 '실패기'만을 적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와 잘못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스토리를 부각한다. 매일 고통스럽게 걷고, 발에 물집이 터지고, 배낭에 짓눌려 쓰러지면서도,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는 여정을 통해서 말이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는 체릴에게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 과정 속에서 상실의 감정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그녀를 조용히 위로한다. 죽음과 이별, 중독, 무기력 같은 연상의 단어들이 트레일의 바람과 함께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실수투성이 하이커, 더 특별한 이유들
책을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많다. 그녀가 '몬스터'라고 부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어 버둥거리며 뒹구는 모습이나, 생리 중에 텐트를 설치하다가 바람에 속옷이 날아가 버린 에피소드 등은 리얼하면서도 인간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PCT는 베테랑 하이커들에게도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장비나 지식도 없이 시작한 체릴은 눈밭에서 길을 잃거나, 뱀과 곰을 마주하고, 음식이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하고, 맨발로 걷기도 하는 등, 고군분투가 보여주는 것은 인생에서 겪는 크고 작은 '실수'와 너무나 닮아 있다.
여정은 아마추어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진정성있는 모습이 다가온다. 완벽한 준비보다 중요한 건, 결국 '시작'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와일드(Wild)』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때론 서툴고 어리숙해도 괜찮다는 말, 누구보다 체릴이 자신에게 먼저 해주었을 그 말을, 이 책을 통해 읽는 이에게 속삭인다.
낯선 이들이 보여준 작지만 큰 온기
여행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체릴이 트레일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인상 깊게 그려진다. 음식을 나누고, 장비를 조언하고, 잘못된 방향을 수정해주는 이름 모를 하이커들, 그리고 잠시 동행하게 되는 친구들까지.
책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닌,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직 하이킹을 하며 만났기에 더욱 진솔하고 의미 있는 관계들을 그려낸다. 길 위에서의 만남은 짧지만 강하게 남는다. '고독한 여정'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여행은 타인의 친절로 가득했던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따뜻한 순간들은 단순한 자기 극복 서사로 끝나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세상은 냉정하지만, 여전히 따뜻하다는 걸 체험한다. 인간관계에 지쳤다면, 이 책의 작은 만남들이 주는 온기를 꼭 느껴보자.
자연이 건네는 위로와 회복의 시간
『와일드(Wild)』의 또 하나의 묘미는 자연 그 차체이다. 그녀가 묘사한 자연은 거칠지만 그만큼 생생하게 다가온다.
"발 끝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작가는 광활한 사막, 눈 덮인 산맥, 깊고 울창한 숲과 맑은 호수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북아메리카 태평안 연안의 웅장한 자연이 머릿속에 펼쳐질 것이다.
자연은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관대하다. 그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고, 겸손해진다. 하루에 수 십 킬로를 걸으며 비우고 또 비워내는 여정은 단순히 걷기를 넘어 내면의 치유로 이어진다.
또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단순해짐을 느끼게 된다. 먹고 자고 걷는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삶의 복잡함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다. 도시의 소음이나 TV 소리 없는 공간에서 진정한 '쉼'이 가져오는 감정은 어쩌면 잊고 있던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여성의 목소리로 기록하다.
장거리 하이킹 서사는 대부분 남성 중심으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 그것도 삶의 상실과 혼돈을 겪은 여성의 시선으로 길을 이야기한다.
여성으로서 혼자 트레일을 걷는 불안감, 두려움, 성적 위협의 가능성들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 그렇기에 단순한 자아 탐색의 여정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자립과 해방의 기록으로도 해석된다. 체릴의 발걸음은 곧 여성 하이커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나도 가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체릴의 여정은 남성 중심 서사에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한다.
여행을 꿈꾸는 이에게~
『와일드(Wild)』는 PCT를 걷고 싶게 만드는 책이지만, 동시에 각자의 '인생의 트레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 모든 게 무너진 듯한 시기에 이 책을 읽는다면 속삭이는 체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것이다.
"지금도 괜찮아, 계속 걷기만 하면 돼."
PCT에서 찾은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다. 아주 작고 평볌한 '자신'이다. 그것은 어쩌면 여행을 통해 바라는 가장 큰 선물일지 모른다.
여행은 꼭 멀리 가야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길이든, 내 마음 안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는 순간, 곧 여행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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