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시보다 놀라운 일본의 식문화, 『Rice, Noodle, Fish』 미식 인문서

음식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언젠가 일본의 어느 이자카야 구석에서,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매트 굴딩(Matt Goulding)의 『Rice, Noodle, Fish』는 이런 꿈 같은 장면을 현실로 안내하는 맛의 나침반 같은 책이다. '맛집 리스트'로 가득 찬 가이드북이 아닌, 음식 너머에 자리한 사람들의 삶과 전통, 도시 문화까지 폭넓게 담고 있는 책이다.


셰프, 작가, 여행가 매트 굴딩

매트 굴딩은 셰프이면서 음식전문 작가로서 경험 많은 여행가이다. 앤서니 부르댕의 출판 임프린트로 발간된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일본의 먹거리 생태계를 심도있게 조명하고 있다.

도쿄부터 교토, 히로시마, 후쿠오카, 오사카, 홋카이도, 노토 반도까지 총 7개의 지역을 아우르며 일본 식문화에 대한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사한다. 

"삶의 기술 그 자체를 체화한 결과물"

일본 음식 문화를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매트 굴딩은 서양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정성(精誠)" 혹은 장인정신을 구체적인 사례와 컬러풀한 사진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책은 깊이 있고 흥미롭게 눈길을 끌어낸다. 

스시에 있어서 '신선함'이란 단순히 재료가 신선해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어떤 생선을 언제 숙성시키고 어떤 온도로 제공해야 최고 정점의 맛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몇 십년을 갈고 닦아온 스시 장인들의 고민을 날 것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Rice, Noodle, Fish』의 특징

지역별로 펼쳐지는 몰입형 서사

책이 가져오는 진정한 가치는 여행 가이드로서의 실용성 뿐 아니라, 글 자체에 담긴 서사성과 몰입감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쿄 편에서 등장하는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
"네 시간 만에 이 모든 재료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새벽 3시에 시작되어 아침 7시 쯤이면 완벽한 형태의 초밥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를 서사적으로 풀어낸다. 매트 굴딩은 도쿄의 거대한 어시장인 츠키지 시장에서 재료가 어떻게 골라지고 처리되는지 낱낱이 기록하며, 그 사이사이 사람들의 품은 열망과 삶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오사카 편에서는 번화한 거리와 저렴한 길거리 음식들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며 형성된 특유의 분위기를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적고 있다.
"노점마다 다르지만, 타코야키를 굽는 소리가 미묘하게 달라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음식, 문화, 그리고 사람

작가는 단순히 음식의 맛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문화, 역사를 긴밀하게 엮어낸다. 쿄토의 가이세키 요리를 두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한 상(床)에 담긴 시간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흘러왔다."

이 문장은 일본의 다도 문화와 가이세키 요리가 서로 오랜 세월 교류하며 완성도를 높여온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기껏해야 몇 분 만에 해치울 수도 있는 식사이지만, 그 뒤에 수백 년의 역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대목이다.

후쿠오카와 같은 도시에서는 노점 문화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좁다란 골목을 따라 드리워진 빨간 등불 아래,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한 그릇의 라멘을 비워낼 때, 사람과 사람이 가장 가까워진다."

음식이 '매개체'가 되어 낯선 이들이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현장을 포착하는 인류학적 접근이 돋보인다.


실용성을 표현한 시각적 장치

이 책이 깊이 있는 문화 서적이면서도 부담 없이 읽히는 이유가 있다. 사진과 인포그래픽 같은 시각 자료를 풍부하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라멘의 정점은 국물이 아닌 면의 텍스처"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인포그래픽이 특히 인상적인데, 면의 굵기와 탄력, 국물의 농도 등을 표 형식으로 정리해,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구체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고 있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가이진(外人) 용어사전', '이자카야 주문 가이드', '와규 등급표' 등은 독자들이 여행 중 활용하기에 아주 좋은 정보다.

"A5 등급을 꿈꾸던 내겐, 그 마블링이 예술이었다."

글귀를 보면, 단순히 고급스러운 수식이 아니라 소고기 등급을 실제로 체감한 매트 굴딩의 생생한 표현이 담겨 있다.


지역별로 전해지는 흥미

스시의 DNA, 도쿄

도쿄 편에선 스시의 세계가 펼쳐진다. 츠키지 시장에서 시작해 긴자 골목의 스시야로 이어지며, 각 가게의 독창적인 방식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생선 손질과 숙성법, 단촛물 밥을 만드는 온도와 시간, 셰프들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조목조목 설명하기 때문이다.

"단 한 점의 생선이 인생을 바꿀수 있다."

어느 스시 셰프의 말처럼, 어떤 음식은 단순히 '맛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져온다. 전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스시가 '정말 제대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체험하고 싶다면 놓칠 수 없는 챕터가 될 것이다. 


미학과 철학의 결정, 교토

전통 가이세키 식당을 직접 방문한 작가는 수백 년 전의 다도 문화와 역사를 설명하며 가이세키 요리를 표현한다.

"접시에 놓인 음식이 계절의 색을 닳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토의 미학"

여기서 핵심은 '우아함'이라 말한다. 가이세키 요리가 추구하는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절제미와 계절감이라 한다.

"주방장은 흰색 접시에 고춧가루 한 점을 찍을까 말까 고민한다" 

셰프들이 하나의 음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는 과정을 문장으로 통해 실감하게 만든다. 


활기와 소울이 가득한 오사카

"오사카의 골목길은 어느 방향으로 가도 먹거리로 통한다."

이 문장 한 줄로 오사카를 알 수 있다. 매트 굴딩은 타코야키와 오코노미야키, 그리고 수많은 소울 푸드를 언급하며, 오사카가 '일본의 부엌'이라 불리는 이유를 몸소 증명해냈다. 길거리에 "숨겨진 낙원 같은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고, 저마다의 레시피로 반죽을 만들고 문어를 익히는 과정은 요리 이상의 축제처럼 느껴진다.

또한, 노점 상인의 40년 경력 이야기를 언급하며 사람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오사카의 문화를 조명하기도 한다. 

"하루 2,000개의 타코야키를 굽는 동안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매트 굴딩의 이 한 줄은, 오사카를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후쿠오카와 히로시마 

후쿠오카에 이르면 다양한 라멘 이야기가 등장한다.
"진한 돈코츠 국물은 그 자체로 역사다."

라멘 한 그릇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20시간 이상 푹 고은 뼈 국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을 묘사한 문장에서는, 맛뿐 아니라 오랜 전통과 수많은 시도가 엉켜만들어낸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히로시마에서는 도시가 주는 메세지와 오코노미야키와의 연결점을 표현한다.

"7층으로 쌓아 올린 재료가 만들어내는 풍미는, 어쩌면 도시가 지닌 고된 역사 위에 피어난 희망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치유해 나갈 수 있는지 되짚어보게 만드는 문장이다. 


발효와 자연의 산물 노토 반도와 홋카이도

발효 음식으로 대표되는 노토 반도에서는 가족 단위의 전승이 이루는 전통적 음식 문화를 다룬다.

"생선 내장 발효액 '이시루'의 짙은 향기는 3대를 거쳐 전수되었다."

발효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슬로우 푸드이다. 발효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작용과 맛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또 다른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홋카이도 편에서는 자연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기타치(북방 사슴) 요리는 아이누 전통의 현대적 해석." 

전통문화와 지역 고유의 식문화를 재발견하고 현대적인 레스토랑에서 재해석하는 시도가 인상적으로 그려지는 챕터이며, 음식이 과거의 답습하는 것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살아 있는 문화를 담고 있다.


인문학적 시각과 스토리텔링

작가는 한 장 한 장이 여행기이자 인간 드라마로서 '음식 문화'라는 거대한 테마를 오롯이 그려낸다.

"여행이란 누군가의 일상을 잠깐 빌려보는 것"

독자 역시 일상을 빌려보는 기쁨을 만끽해 볼 수 있다. 책 속에 담겨진 195장에 이르는 사진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음식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분위기와 문화를 그대로 전달한다. 

실제로 일본 여행을 계획한다면, 책 말미의 섹션이나 챕터 중간중간에 삽입된 Tip 모음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여러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서 완벽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 문화를 지나치게 이상화한다는 비판도 있고, 일본 음식 문화를 신비화하거나 동양적 신비라는 시각으로 포장한다는 지적들도 있다. 서구에서 바라본 시각이기때문에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틀 밖으로 시선을 던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음식은 그 나라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Rice, Noodle, Fish』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포만감 이상의 호기심을 얻게 될 것이다.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를 멋지게 경험해볼지는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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