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가지 않아도 가능한 여행? 「그리고 괴테는 결코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떠난다'는 의미로 여겨지는 여행이 있다. 때로는 "직접 가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이미 수십 번 여행한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독일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그리스에 품었던 열정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 싶다. 정작 괴테는 그리스에는 한 번도 발을 딛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과 작품 속에는 찬란한 그리스 문화와 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직접 가지 않아도 가능한 여행? 「그리고 괴테는 결코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이 사실에 착안한 독일 작가 윈프리트 뢰슈부르크(Winfried Löschburg)는 1997년 발간한 「그리고 괴테는 결코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여행의 소문화사(Und Goethe war nie in Griechenland: Kleine Kulturgeschichte des Reisens)」에서 '가지 않는 곳에 대한 동경'을 매개로한 여행의 문화사를 풀어내고 있다.

낯선 땅을 찾는 인간의 욕망

여행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끊임없이 이어온 행위이다. 가장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이동을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생존이었다. 사냥을 위해서든, 교역을 위해서든, 더 좋은 땅을 찾기 위해서든 인류의 이동은 필수였다. 뢰슈부르크는 '기원으로서의 여행'을 고대 로마의 도로망, 카라반(대상) 경로, 해상 무역로 등을 예시로 들어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곧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였다"

고대 시대를 지나 중세로 들어오면서 유럽에는 순례 여행, 교역 여행, 학문적 교류를 위한 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여행이 나타났다. 이런 흐름은 근대에 이르러 '그랜드 투어(Grand Tour)'로 대표되는 지식층의 교육 여행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럽 귀족층 사이에서 이탈리아는 이미 예술과 고대 유적을 탐방하기 위한 주된 목적지였으며, 문화적 풍요로움은 '여행'을 단순한 이동이 아닌 '학문적이고 예술적 성취'를 위한 투자로 만들었다. '여행이 명예와 교양을 상징하던 시설'이라고 뢰슈부르크는 묘사한다.

괴테의 영혼이 닿았던 그리스

괴테는 왜 이탈리아를 택했을까? 당대에 이탈리아는 유럽 지식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성지 같은 곳이었다. 고대 로마의 유적을 직접 목격하고 예술 작품들을 체험하는 일은, 지적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고 한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괴테의 마음은 늘 그리스에 가 있었다. 

"모든 민족 중에서 그리스인들이 삶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꾸었다."

뢰슈부르크는 괴테가 '고대 그리스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진 문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스의 땅을 영혼으로 찾는다(Ich suche das Land Griechen mit meiner Seele)"

실제로 괴테가 말한 이 대목은, 그가 굳이 실제 발걸음으로 옮기지 않아도 정신적 '그리스 여행'을 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뢰슈부르크는 "여행이란 반드시 지리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역설을 던지고 있다.

역설이 주는 이상 향유의 방식

당시에 이탈리아까지는 비교적으로 교통이 편리했지만, 그리스 본토를 여행하기에는 여러 가지의 현실적인 장애가 많았다고 한다. 정치적 분쟁, 안전 문제, 지리적인 조건 등이 겹쳤던 터라, 괴테가 실용적인 이유로 이탈리아를 여행지로 선택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괴테킄 그리스에 가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예술가로서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뢰슈부르크는 괴테의 절묘한 아이러니를 "이상을 동경하는 자의 자유"라고 해석한다. 현실에서 쉽게 다다를 수 없다면, 이상은 더욱 숭고해지기 마련이다.

"실제와 이상이 충돌하고 때로 동화되며 탄생하는 예술적 성취"

이런 이유로 책의 제목이 "괴테는 결고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로 결정된 것은, 사람들이 가진 '이상 향유의 방식'을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장치가 된다.

독일이 추구한 필헬레니즘

괴데의 그리스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독일 지식인 사회 전반체 팽배했던 '필헬레니즘(Philhellenism)'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괴테 이전에도,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독일의 문인,사상가들이 고대 그리스에 대한 동경을 공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예술과 철학의 정수는 모두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고, 괴테의 친구였던 시인 실러 또한 그리스 문화를 지상 최고의 표상으로 찬미한다.

뢰슈부르크는 이 흐름을 자세히 짚어낸다.

"독일 문화의 정체성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빌려온 이상미학을 중추로 삼았다."

괴테가 살아간 18~19세기, 그리고 그 이후의 독일 문학과 사상계가 어떻게 그리스의 이상미를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는지, 분석해보면 '인간은 왜 이상향을 꿈꾸는가'라는 보편적 물음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행위가 단순한 관광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행의 변화사'를 훑어내다

책이 특별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괴테와 그리스를 소재로 삼아 "여행이 어떻게 진화해왔는가"를 다루면서도, 고세, 중세, 근대를 관통하는 광범위한 역사, 문화 정보를 정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여행 인프라를 언급할 때, 읽는 이가 놓치기 쉬운 교통로나 숙박 시설에 대한 배경 지식을 알기쉽게 풀어놓고 있다. 이것이 뢰슈부르크가 말하는 '문화사적 시선'이다.

다양한 시대적 맥락을 통해서,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여행은 언제나 개인적 성장과 사회적 변화의 마중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역시 예술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독일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배경이 된 것이다.

'이탈리아 기행'에 깃든 순례와 환영

괴테가 남긴 「이탈리아 기행(Italienische Reise)」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예술을 향한 영적 탐구로 읽혀지고 있다. 

"괴테가 현실에서 찾은 아르카디아(Arcadia)"

실제로도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예술과 고대 유적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통해 작가로서 자신을 재정립했다.

흥미로운 것은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로마 속의 그리스'를 찾아 헤맸다는 사실이다. 로마유적과 미술을 보며, 동시에 고대 그리스가 남긴 미의 흔적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괴테에게 이탈리아는 그리스의 그림자를 좇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매혹적인 무대였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리스를 밟지 않아도, 이미 그의 여행은 '이탈리아라는 창문'을 통해 상상의 그리스 세계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행 의미'의 전환

책 후반부에서 현대의 여행을 짧게 나마 다루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행기와 철도 등 교통수단의 급속한 발달과 대중 관광 산업의 부상을 다루고 있다

"여행이 귀족이나 지식인의 전유물에서 전 세계 대중이 즐기는 문화 현상으로 거듭나다"

항공권이 저렴해지면서 해외 여행이 쉬워지고, 패키지 투어가 등장해서 단체 관광이 확산되는 양상도 조명하고 있다.

뢰슈부르크는 이렇게 질문한다.

"괴테가 실제로 그리스에 가지 않고도 그 문화를 사랑하고 이해한 것처럼, 굳이 물리적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지구 반대편을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행의 본질'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단순한 관광지의 소비를 넘어, 한 지역의 역사, 문화,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자아를 확장해나가는 행위가 참다운 여행이 아닌가 하는 성찰로 이어지게 한다.

 "가보지 않는 곳"이 움직이게 하는 힘

"여행은 경험의 총합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경험'이 꼭 발품을 팔아야만 쌓이는 것일까? 괴테의 사례처럼 인간의 상상력과 열린 자세는 놀라운 방식으로 '미지의 문화'를 체화해 낼 수 있다.

"여행을 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여행을 떠날 때, 더 깊이 그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괴테가 그리스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역설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는 순간, 여행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여행은 우리를 이동시키는 발자국 이전에, 이미 마음속 상상과 열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말 한마디가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본 자에게만 보이는 경치와 같이, '가지 않는 곳'을 향한 동경은 끝내 더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삶으로 안내할지도 모른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실크로드 세계사』 여행의 깊이를 더해준 한 권의 책

나무의 심장박동을 듣다. 『The Heartbeat of Trees』가 알려준 감성 트래블

진짜 여행은 지도에 없다! 모노클이 안내하는 도시의 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