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보다 더 깊은 여행, 고대와 현대를 잇는 한 권의 책

기자 리슈아르트 카푸시친스키(Ryszard Kapuścinski)가 첫 해외 특파 임무를 맡아 떠나게 되었을때 손에 쥔 것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였다. 현대의 기자가 2500년 전의 '첫 번째 저널리스트'와 만난 특별한 이야기는 어떤 여행과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헤로도토스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Herodotus)』은 현대의 여행과 고대역사를 절묘하게 연결하며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한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


여행, 그 시작은 책 한 권에서

카푸시친스키가 처음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55년, 그가 신문사에서 받은 첫 번째 선물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였다고 한다. 이 책에는 고대의 역사 기록과 함께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여행은 출발할 때 시작되는 것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 말을 곱씹으면서 자신의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의 제한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지로 여정을 떠나게 된다. 

"사실 여행은 그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고, 우리가 멈춘 후에도 기억의 테이크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인도, 감각의 폭풍 속으로

첫 해외 특파 임무로 파견된 인도는 카푸시친스키에게 강렬한 인상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언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압도적인 감각의 홍수 속에 휩쓸리게 된다. 델리의 거리에서 땡볕 속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니는 사람들과, 거리 한 켠에 펼쳐진 노점상들의 다채로운 과일,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로 가득한 공기를 경험하며 정신없이 헤메었던 기억을 회고한다.

소음과 냄새에 질려 호텔로 돌아가려다 길을 잃고, 힌디어로 쓰인 표지판만 가득한 교차로에 멈춰서 있는 경험들을 수록하고 있다.

"처음으로 인도의 거리를 걷는 것은 감각적 폭풍 한가운데에 서는 것과 같다."

그는 책 속에서 독자에게 자신이 접했던 인도의 무더위와 그 속에 짙게 퍼저나오는 향기들, 북적이는 시장과 골목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중국, 역사와 은유의 땅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의 중국을 방문한 카푸시친스키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깊이있게 관찰한다.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만리장성을 고대의 방어시설이 아닌, 고립된 중국사회를 상징하는 은유로 바라보고 있다.
"만리장성은 내게 점점 더 위대한 은유로 다가왔다."

중국에서의 경험은 그가 여행자로서 얼마나 깊이 있게 각 사회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프리카의 풍경과 모순

카푸시친스키가 방문한 아프리카는 모순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금주령으로 인해 빈 맥주병을 버릴 곳을 찾아 헤메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수단 하르툼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을 지켜보며 관객들의 무표정한 반응 속에서 문화적인 간극을 느끼기도 한다. 격변의 콩고에서는 사람들의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장을 목격했으며,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는 탈식민국의 혼란과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기에 이른다.

"수단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 암스트롱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문화적 차이의 깊이를 느꼈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러 다른 문화의 미묘한 차이와 그 배경에 존재하는 역사의 사건들을 주목하게 한다.


동서양의 충돌, 알제리에서 깨닫다

쿠데타가 발생한 그 순간에 알제리에 도착한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도시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지중해를 보며, 헤로도토스가 기록했던 동서양의 충돌과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을 떠올린다.

"동지중해의 파도는 오랜 역사 속에서 동서양의 충돌을 목도한 유일한 목격자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함께하는 그의 여행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체험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 본성을 탐구한 헤로도토스의 '역사' 

카푸시친스키는 책 전반에 걸쳐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며 인간 본성에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 기록의 중요성과 개인적인 이야기의 힘을 강조하며, 헤로도토스를 단순한 역사가에서 세계화의 첫 번째 목격자이자 저널리스트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바빌론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포위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가족 구성원 중 여성을 희생시키기로 한 결정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가장 사랑하는 사람 두 명만 남기고 나머지를 질식시키기로 결정했다. 누구도 이 결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고, 결정은 조용히 실행되었다."

그는 이 기록을 통해, 인간의 선택과 생존 본능, 그리고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헤로도토스는 사건의 기록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수집자였고, 인간의 이야기와 경험이 곧 역사 그 자체임을 알았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여행

카푸시친스키의 여행기는 그의 깊은 관찰력과 역사적 통찰력의 결과물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지으며, 지금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여행자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여행보다 더 깊은 여행, 고대와 현대를 잇는 한 권의 책

읽는 내내 이 책은 단순한 지식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역사와 여행, 글쓰기와 사색이 만나는 특별한 여정에서 여전히 낯선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면 한 번쯤 동행해도 될 책이다. 카푸시친스키와 헤로도토스, 이 두 여행자의 이야기와 함께 나침반을 놓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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