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여행을 다시 배우다, 『Atlas Obsc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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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세계지도를 바라보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그 종이 위에는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세상이 무수히 떠 있었고, 손가락으로 그 위를 더듬으며 이름도 낯선 도시를 읽어보곤 했다. 『Atlas Obscura』는 그런 어린 시절의 경외심을 다시 불러오는 책이다. 너무나도 밀도 있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담겨 있다. "여행은 익숙함을 지우는 연습이다." 아틀라스가 아닌, 경이의 수집함 책을 펼치자 마자 시선에 들어온 것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 한가운데. 현지에서는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그 장소다, 40년 넘게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천연 가스 구덩이로, 마치 지구의 숨구멍처럼 어둠 속에서 울컥울컥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다큐멘터리에서 지나치듯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책에서 그 장면을 다시 보게되니, 더 없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장작처럼 피어오르는 불길과 모래 위로 진동하는 열기의 묘사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살아 움직이듯 보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손끝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저자들은 이 책을 '호기심의 캐비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이 왜 절묘하게 맞는지, 이 장면에서 깨닫게 되었다. 장소 하나하나가 냉장 보관된 백과사전 속 정보가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기억의 파편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익숙하지 않음이 주는 자유 책은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뉴질랜드의 반딧불이 동굴이나, 그 어둠 속을 빛으로 수놓은 자연의 장면 앞에서 푹 빠져 버렸다. 인도의 계단식 우물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수학적 질서가 어우러진 조형물로서 눈을 사로잡았고, 영국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머리로 작동하는 날씨 예보 장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고도 기묘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과 환상이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보고있으면 지금 당장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고 싶게 만든다. 계획보다는 ...

제네바에서 키베르까지, 부비에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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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권의 책이, 삶의 방향을 흔들어놓는 일이 있다. 니콜라 부비에의 『The Way of the World(세상의 용법)』은 내게 그러한 충격을 안겨준 책이다. 책에서는 여행의 노하우는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익숙한 기준을 내려놓고,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행은 사람을 만들거나 해체시킨다" 는 부비에의 고백처럼,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마치 해체된 퍼즐 조각이 새로운 질서를 찾아 맞춰지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피아트 토폴리노, 고장이라는 축복 여행에서 동행이란 단어는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용법』에서 부비에와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티에리 베르네의 여정에 함께한 피아트 토폴리노는 단순한 탈것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그 낡은 자동차는 말없이 이들의 길을 함께 걸었고, 고장이라는 이름의 우연한 정지에서 수많은 인연과 마주침을 가능케 했다. 작은 엔진의 떨림과 오일 냄새, 균열 난 차체 아래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황폐한 정비소야말로 형이상학적 만남의 장소였다" 부비에의 묘사는 과장이 아니라 실감이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정비소 안에서도, 인간의 체온과 이야기는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 만난 누군가의 짧은 미소, 도와주려는 손길, 커피 한 잔의 온기야말로 여행 중 만나는 진짜 사람 냄새였다. 토폴리노는 자주 멈췄고, 그 멈춤이야말로 두 사람이 '세상'을 만나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타브리즈에서 배운 느림의 미학 이란 북부 타브리즈에서 부비에와 베르네가 보낸 겨울은, 내게도 오래도록 머무는 장면이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여행을 잠시 멈추고, 낯선 도시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빠르게 회전하는 문명의 기어에서 잠시 벗어나, 이들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워간다. 오늘날처럼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에, 그런 '정지'는 오히려 불편하고 두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

가보지 않았기에 선명한 베니스, 『Venice Ob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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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는 가본 적이 없다. 메리 맥카시의 베니스 관찰기』를 접하게 되고, 한 계절쯤 그 도시에서 살아본 듯한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어떤 장소는 직접 가보지 않아도, 좋은 문장을 따라 상상 속에서 충분히 살아볼 수 있다. 바로 이 책은 그런 마법을 보여준다. 낭만과 고전 사이, 베니스라는 역설 내게 베니스는 늘 엽서 속 이미지였다. 푸른 운하와 반짝이는 곤돌라,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에 내려앉은 흰 비둘기 떼. 저자는 이런 인상들을 첫 장부터 정면에서 깨뜨려 버린다. 그녀는 베니스에 대해 쓰는 일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데, 모든 사람이 베니스에 대해 같은 말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조차도 베니스의 본질이라는 역설이 이 책의 시작이 된다. “베니스는 누구에게나 같은 감정을 주는 도시다. 그 감정은 진부하지만, 동시에 진실하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마트폰에 담긴 여행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던 행동이 실은 표면만 훑고 지나간 기록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은 빛나는 순간만을 포착하지만, 맥카시의 문장에서는 그 도시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그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있다. 베니스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한 장의 낭만으로 소비되기보다는, 단어와 문장의 결을 따라가며 느껴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창문 하나가 만든 관찰자의 거리감 저자는 베니스의 거리를 걷는 것 보다,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녀가 머물던 팔라초의 창가에서 베니스를 일상처럼 소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에서 사유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직접 뛰어드는 대신 한 발 물러나 도시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식이 책의 전체적인 태도를 결정짓고 있다. 그래서 『베니스 관찰기』는 현장감 넘치기 보다, 도시에 대한 명상을 산문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녀는 운하의 표면에서 빛나는 윤슬의 아름다움에 더해, 그 아래에 흐르고 가라앉은 시간의 흔적과 인간의 흔들림에 더 주목하고 있다. “시...

호텔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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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거닐다 보면, 한적한 거리에서 번쩍이는 호텔 간판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 순간 나는 종종 상상한다. 저 안에선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벽 너머의 사람들은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할까. 김다영 작가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를 펼쳤을 때,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는 한 권의 여행을 만나게 된다. 익숙하게만 여겨졌던 호텔이라는 공간이, 이제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여행의 주인공으로 다가왔다. 호텔을 고르면, 여행의 중심이 달라진다 기존의 여행 계획은 대부분 이렇게 흘러간다. 도착지와 보고 싶은 장소를 먼저 정하고, 마지막에 '괜찮은 숙소'를 고른다. 그러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는 그 순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책에서는 “호텔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동의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몇 년 전, 베트남에서 우연히 예약하고 머물렀던 한 호이안의 고즈넉한 인테리어의 호텔에서 여행의 일정에서 숙소에서 머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화창한 날이었지만,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바깥 풍경이 은은히 흐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보낸 그 하루는 그 어떤 관광보다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호텔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내는 장소”라고. 저자가 얘기한다. 이 문장 하나에 이 책의 모든 의미가 압축돼 있다. 여행의 키워드는 이제 ‘능동적 휴식’ 무작정 쉬기 위한 여행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쉬는 여행’. 이 책은 그 개념을 다양한 호텔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다. 여행은 의무가 아닌 휴식과 새로움을 얻고자 하는 여정이다. 보통 여행을 하면서도 일정표에 묶이고, 구글맵에 의지하며 헤메다 그 시간마저 일처럼 보낸다. 책에서는 그런 여행의 틀을 부드럽게 흔든다. “어메니티 하나, 침대 옆 조도, 로비의 음악”이 곧 나를 움직이게 한다고.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건, 하와이 라나이 섬의 포시즌스 호텔을 소개한 대목이다. '스트레스를 섬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