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 키베르까지, 부비에의 여행
살면서 단 한 권의 책이, 삶의 방향을 흔들어놓는 일이 있다. 니콜라 부비에의 『The Way of the World(세상의 용법)』은 내게 그러한 충격을 안겨준 책이다. 책에서는 여행의 노하우는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익숙한 기준을 내려놓고, 세상을 보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행은 사람을 만들거나 해체시킨다"는 부비에의 고백처럼,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마치 해체된 퍼즐 조각이 새로운 질서를 찾아 맞춰지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피아트 토폴리노, 고장이라는 축복
여행에서 동행이란 단어는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용법』에서 부비에와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티에리 베르네의 여정에 함께한 피아트 토폴리노는 단순한 탈것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그 낡은 자동차는 말없이 이들의 길을 함께 걸었고, 고장이라는 이름의 우연한 정지에서 수많은 인연과 마주침을 가능케 했다. 작은 엔진의 떨림과 오일 냄새, 균열 난 차체 아래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황폐한 정비소야말로 형이상학적 만남의 장소였다"
부비에의 묘사는 과장이 아니라 실감이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정비소 안에서도, 인간의 체온과 이야기는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 만난 누군가의 짧은 미소, 도와주려는 손길, 커피 한 잔의 온기야말로 여행 중 만나는 진짜 사람 냄새였다. 토폴리노는 자주 멈췄고, 그 멈춤이야말로 두 사람이 '세상'을 만나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타브리즈에서 배운 느림의 미학
이란 북부 타브리즈에서 부비에와 베르네가 보낸 겨울은, 내게도 오래도록 머무는 장면이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여행을 잠시 멈추고, 낯선 도시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빠르게 회전하는 문명의 기어에서 잠시 벗어나, 이들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워간다. 오늘날처럼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에, 그런 '정지'는 오히려 불편하고 두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부비에는 이를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다시 배치한다.
타브리즈의 겨울
낮에는 시장을 거닐며 낯선 채소 이름을 배우고, 저녁이면 거리의 찻집에서 정비사와 나눈 짧은 대화를 되새긴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던 수증기 속엔, 묵은 피로보다 먼저 마음의 격자가 스르르 풀려나간다. 그 느림은 단지 속도를 늦추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어떤 풍경은 걸음을 멈췄을 때만 제대로 보이기 마련이다. 타브리즈에서의 그 겨울은 부비에에게도, 그리고 글을 읽는 이에게도, 삶의 질서를 새롭게 배열해보라는 은근한 권유처럼 느껴진다.
퀘타, 상실과 수용의 도시
파키스탄 퀘타에서 부비에는 일기장을 도난당한다. 여행자에게 있어 일기장은 기록이라는 의미보다는 시간의 압축적 구성이며, 감정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때로는 정체성을 되짚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 중요한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책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비에도 잠시 혼란을 겪었지만, 그는 곧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겨울의 모든 작업이 사라져버렸다"는 절규 같은 문장 속에서도, 어딘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결이 느껴보게 된다.
낯선도시 새로운 적응
그는 퀘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베르네는 그림을 팔며 둘은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밤이 되면 먼지 낀 골목길과 저렴한 술집이 그들의 공연장이 된다. 낯선 도시에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삶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부비에는 퀘타에서 바로 그 감각을 체득한다. 정해진 계획도, 완벽한 준비도 없이 매 순간을 마주하는 일. 그 속에서 그는 생의 유연함, 혹은 잃어버림 이후의 새로운 적응을 배워간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과거 어느 여행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억이 떠올려 본다. 사진 한 장, 기록 하나가 사라졌을 때 느껴졌던 허무함.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실은 새로운 기억을 불러들이는 빈자리가 되었다. 퀘타의 골목을 지나며 부비에가 겪었던 감정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잃어버림 속에서 단단해진다.
키베르 고개, 헤어짐의 언덕
키베르 고개에 도착했을 무렵, 부비에와 베르네는 서로에게 작별을 고한다. 한 해 반을 함께 달려온 이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갈라서게 된다. 베르네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스리랑카로 향하고, 부비에는 다시 홀로 길을 나선다. 여행이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의 만남을 수반하지만, 그만큼 이별 또한 잦다. 길 위에서의 이별은 더이상 비극적인 순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길의 일부이기도 했고, 오히려 여정의 깊이를 더해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고통이 아닌 이별들
부비에는 이 이별을 고통스럽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리고 묘하게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장면을 그려낸다. 여정의 마지막에 마주하는 헤어짐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에 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묘사가 인상 깊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우리를 수용하기보다 해체시키고 다시 조립하려 든다." 이 문장은 그저 철학적인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이별이란 경험 자체가 삶의 구조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을 직접 느낀 자의 기록이다.
공항의 출국장 앞에서,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혹은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들과의 흔적들. 그것들은 모두 어딘가에 감정의 단면을 남기고, 시간이 지나 내 안에서 다시 쌓여있는 기억이 되어. 부비에의 이 장면은 그 조용한 재구성을 눈앞에 펼쳐 보이며, 읽는이로 하여금 자신의 이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있었다.
단어 너머의 관찰력, 문장 너머가 보여주는 세상
부비에의 문체는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세계는 풍부하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관찰한다. 이란의 시골 마을에서 만난 노인을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바자 모퉁이에 다리를 꼬고 앉아 몇 가지 채소를 팔고 있는 위엄 있는 은둔자 같은 정비사."
이런 묘사는 그가 만난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섬세한 시선은 내가 여행 중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혹시 무심코 지나쳐온 풍경 속의 누군가를, 진정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하고.
『길 위에서』가 아닌 『세상의 용법』
많은 이들이 부비에의 책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와 비교하는데, 이 책은 훨씬 조용하고 깊다고 하겠다. 케루악이 즉흥성과 해방감을 말한다면, 부비에는 관조와 받아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독자가 그 감정을 곱씹게 만든다. 나 역시 『길 위에서』를 좋아하지만, 『세상의 용법』은 내게 더 오래 남아있고, 여행의 환희보다는 그것이 가져오는 고요한 변화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용법이 아닌, 나만의 용법을 발견하다
처음에는 "세상의 용법"이라는 말이 무언가 정답을 말해줄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실용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안내서 같았다. 하지만 읽고 나니 그 제목은 오히려 반어처럼 다가왔다.
니콜라 부비에는 단 한 문장으로 여행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여행은 당신을 만든다, 혹은 해체한다."
이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체득한 명제인 것이다. 여행을 통해 자신이 고정된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유동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리고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인 나 역시 점점 내 안의 무게를 내려놓게 된다.
처음에는 세계를 이해하려 들었지만, 끝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의 진짜 용법이다. 부비에가 말하고 싶었던 건 지도 위의 경로보다, 감정과 생각의 방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그런 여정을 아직 떠나지 못했지만, 삶에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순간을 찾아 작은 여행을 소망해 본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고장이 나더라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나만의 용법을 하나 더 배워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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