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마주친 인간의 진실 『The Places In Between』

2002년 겨울, 영국의 외교관 로리 스튜어트는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헤라트에서 수도 카불까지 단독으로 걸었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직후의 전쟁터,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은 땅. 『The Places In Between』은 그 36일간의 도보 여행을 기록한 여정이자, 인간성과 문명의 경계선을 묵묵히 되짚는 보고서이다.

길 위에서 마주친 인간의 진실  『The Places In Between』

책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는 ‘여행기’의 틀을 넘어서는 무게감을 체감한다. 이 책은 지도 위의 경로에서 벗어나, 정신의 여정을 따라가는 문학적 작품이다. 스튜어트는 어떤 화려한 서사를 덧입히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러나 세밀하게 써내려간 단어들로 삶과 죽음, 환대와 폭력, 폐허와 희망이 혼재된 공간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 보인다. 그 여정에서 독자가 함께 걷는 것은 먼 이국의 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존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문명과 폐허, 그 사이를 걷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흔히 ‘전쟁’으로 기억된다. 스튜어트는 그 땅의 과거와 현재를 겹쳐서 보여준다. 그의 여정은 무굴제국의 창시자 바부르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인 순례기이이다. 책 속에서 그의 발자국을 따라 잼의 미나렛(Minaret of Jam)을 만나고, 바미안의 절벽에서 사라진 불상의 흔적을 목격하게 된다.

무너진 것들 속에서 내가 찾은 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속되고 있는 인간의 기억이었다.

그는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약탈되는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책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결코 냉소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폐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차를 내고, 아이들은 웃으며, 노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괴 속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극한의 고독과 생존의 감각

책의 대부분은 걷는 장면이다. 스튜어트는 9피트 깊이의 눈을 헤치고, 영하의 기온 속에서 야외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식량이 부족하고, 물도 마실 수 없으며, 때로는 탈진한 채 설사와 이질로 고통 받는다. 그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여정을 함께한 마스티프 ‘바부르’는 여행의 또 다른 축이다. 귀가 잘리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개가, 인간과 동행하며 ‘존재’로 거듭나는 여정. 그 둘의 관계는 말이 필요 없는 동반자적 유대를 상징하고 있다.

어떤 날은 내가 바부르를 데려갔고, 어떤 날은 바부르가 나를 데려갔다.

이 말 속엔 생존의 진실이 담겨 있다. 생존이란 서로에게 의지하는 일이며, 혼자서 도달할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낯선 이의 환대가 지닌 힘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스튜어트가 낯선 마을에 들어가 아무런 경고 없이 경계와 적대를 마주할 때였다. 놀랍게도 대부분 그는 음식을 얻고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심지어 자신들도 굶주린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그들이 나에게 준 것은 빵 한 조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이슬람 전통에서의 환대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신의 뜻에 있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문화의 깊이를 이해하고, 서구에서 흔히 오해받는 이슬람 사회의 진면목을 조명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섣부른 이상화도, 피상적 판단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진실의 얼굴이 드러난다.

문화의 경계, 인간의 보편성

책속에서 그는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난다. 부족장과 소년 병사, 탈레반 사령관과 외국 원조 활동가. 이들의 언행은 때로는 잔혹하고, 때로는 황당하며, 때로는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저자가 꾸준히 강조하는 메시지는 ‘일반화의 위험성’이다.

오늘은 친절한 마을에 묵었다. 내일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두 마을 사이는 불과 하루 거리인데, 세상의 끝처럼 다르다.

이 말은 곧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어떤 사회도 단일한 색으로 정의할 수 없다. 모든 곳엔 상반되는 성질이 공존하고, 인간은 복합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시적 언어와 간결한 진실

『The Places In Between』이 문학으로서 위대한 이유가 있다. 스튜어트의 언어 때문이다. 그는 대상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사는 늘 정확하고, 때로는 시처럼 아름답다. ‘While the Note Lasts’, ‘Footprints on the Ceiling’, ‘The Sacred Guest’ 등 각 장의 제목부터가 그러하게 다가온다.

어적 감수성은 여행의 본질을 되묻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진정한 여행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낯선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이야기

책의 제목은 곧 존재론적 선언인 것이다. ‘The Places In Between’—경계 너머가 아니라, 경계 사이에 있는 것들. 스튜어트는 화려한 목적지보다 그 사이의 공간을 기록하며,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신념과 회의 사이에 놓인 존재들을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여행자에게 길의 의미를, 독자에게 인간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길 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진실, 그 아름답고도 복잡한 얼굴들. 『The Places In Between』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사이’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I had become slightly sick of the view of walking as a form of liberation. Walking across a country wasn’t original. I wasn’t writing for self-discovery.” – Rory Stew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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