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은 또 다른 출발이다 –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

끝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편리함과 연결성에 너무 익숙해져 정작 스스로의 내면에는 귀를 닫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느림'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고 마음의 평온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낸시 루이즈 프레이(Nancy Louise Frey)의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원제: Pilgrim Stories: On and Off the Road to Santiago, Journeys Along an Ancient Way in Modern Spain)는 바로 그 느림의 미학과 치유의 경험을 보여주는 책이다.

도착은 또 다른 출발이다 –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

수 세기 전부터 이어져 온 순례길을 지금의 속도로 다시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 걸음을 통해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새롭게 재발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체감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출발점,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길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 걷는다는 의미 때문에 유명해졌다.

과거에는 철저하게 종교적 신념이 깃든 성지순례였지만, 이제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전 세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힐링', '자아성찰'을 위해 찾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대인이 과거와 자연, 나아가 자기 자신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는 길"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단순한 유럽 도보 여행의 명소로 묘사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국경부근 생장(Sanit-Jean-Pied-de-Port)에서 시작해 약 800km를 걷는 전통적인 구간을 포함하여 포르투갈 루트, 북부 루트 등 여러 갈래가 순례길로 불린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프랑스 구간을 선택하는데,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 내륙을 지나는 한 달 이상의 긴 구간을 가장 선호도가 높다.

"순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걷는 이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 위의 순간을 음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인류학적 시선이 머무는 길

저자는 문화인류학자이다. 이런 독특한 점이 다른 여행서적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그녀는 1990년대 부터 실제 여러 차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순례자들과 동거동락 해오면서, 그 과정을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개인적 감상과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순례자의 동기와 행동, 그 변화 과정을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깊이있게 파헤치고 있다.

"순례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공동체와 소통하며,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구상하는 매개체"

책 전반에 강조하고 주장하는 내용은 그녀가 수집한 다양한 국적, 연령, 직업을 가진 순례자들과의 인터뷰에 나타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떻게 '전 세계인의 치유 공간'이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눈 길을 사로잡는 부분도 있다.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다.

"현대인이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 이 길로 몰려든다" 

대다수의 순례자가 편안하고 빠른 교통수단 대신 장시간의 도보를 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사회적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짚고 있다.

'느림의 즐거움'을 느끼다

작가는 책에서 길에서 직접 체득한 '느림의 힘'을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다. 폭염 속에서 땀범벅이 된 채 한 걸음씩 걷거나, 뜻밖의 폭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을 옮기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걷기의 의미가 단순한 이동을 넘어 어떻게 깊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지 실감할 수 있다고 한다.

"발바닥으로 느끼는 날카로운 자갈은 과거의 상처를 일깨워주고, 온몸을 파고드는 땀과 통증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준다."

중세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순례길을 걷다 보면, 속도를 줄이는 동시에 시야와 감각은 오히려 넓어지면서 여행자의 내면을 강렬하게 자극하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느림의 즐거움은, 단순히 육체적 '걷기' 자체를 넘어 일상 속에서 놓치고 사는 사소한 풍경과 감정들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순례길에서의 느림은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주며, 익숙했던 장소도 낯설게 보이게 만들고, 그 낯섦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태어난다."

'내면의 문'을 열다

사람마다 느끼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영적 탐색', '육체적 한계 도전' 등 다양할 것이다. 그녀가 만난 순례자들 중에는 실연이나 가족문제, 직업적인 위기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길을 찾은 이들이 많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와 마주하며, 어느새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포착하고 있다.

"카미노에 있으면, 사람들은 상실과 실패, 트라우마, 두려움 같은 마음 속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길은 이 상처를 숨기기보다 드러내도록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드러냄이 치유의 시작이다."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여정이 주는 강렬한 힘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치유의 길'

치유의 길(la ruta de la terapia)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순례길이 누군가에게는 상담치료보다 더 효과적인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걷는 동안 순례자는 자신의 상처를 솔직히 마주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게 된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둔다.

몸으로 배우는 순례

작가는 순례길에서 만나게 되는 갖가지 풍경과 함께, 나이가 많은 순례자들이 겪는 일이나 소소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무릎 통증이나, 발바닥의 물집, 갑작스런 폭우 속에서의 야영과 같이 구체적인 이야기 거리는 현장감과 몰입도를 높이고 순례길의 환상을 깨뜨려주기도 한다.
"순례자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게 되고, 몸은 마음의 통역사가 된다."

인류학자의 시선이 아니라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면들을 분석하며, 고된 걷기가 성찰과 변화로 이어지는 과정이며, '순례는 몸과 마음의 통합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길의 끝, 새로운 시작의 알림

많은 여행 서적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을 '대단원'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 '귀향'과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순례증서(콤포스텔라)를 받고 환호하는 이들의 표정 뒤에 숨겨진 현실로 돌아가야하는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리를 살핀다

"순례는 화려하게 끝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의 문을 연다."

실제로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뒤 생활 방식을 바꾸거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는 순례자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관찰 포인트이다.

"도착은 또 다른 출발이라는 모순적 사실을 카미노가 가르쳐주었다"

여행이 단순한 완료형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 영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건으로 보게하는 대목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또 다른 여정을 위해

작가는 책 말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부활은 중세 문화를 되살리려는 어떤 정치적 시도나 단순한 종교적 열광으로만 해석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히려 이 길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공간으로서, 다양한 계층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재정의하는 장이라고 설명한다.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삶의 어느 순간, 나를 바꾸고 싶은 갈망이 있을 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하루에도 마음 한 구석이 지쳐 문득 쉬어가고 싶을 때,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려보자

"모든 도착은 새로운 출발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 각자 마음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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