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퍼진 쓰촨의 소울

면 덕후의 중국 누들 먹부림 여행기
중면총(中麵總), 중국의 면을 총괄하다

02 단단멘 担担面 탄탄면 3  : 홍콩

전 세계에 퍼진 쓰촨의 소울

쓰촨 요리는 중국 8대 요리 중에서도 가장 개성 넘치고 강렬한 맛이 갑인 장르다. ‘일채일격, 백채백미(一菜一格 百菜百味)’, ‘백 가지 요리에백 가지 맛’이라는 거창한 철학도 품고 있다. 쓰촨 사람들은 같은 재료라도 소스, 양념, 불 조절에 따라 레전드 맛을 내는 쓰촨요리에 자부심이 대단하단다. 얼얼하고 매운 마라, 향신채와 양념의 폭발, 기름지지만 개운한 조화, 단짠단짠과 시고 얼얼한 복합적인 맛의 향연. 이 강렬한 개성이 전 세계를 매료시켰고, 그 중심엔 바로 단단멘이 있다.

마라한 맛의 기본 재료 중 하나인 쓰촨 고추
마라한 맛의 기본 재료 중 하나인 쓰촨 고추

특히 강력하고 마법 같은 쓰촨표 ‘마라한 맛’의 매력과 중독 성의 끝판왕이라, 아예 ‘쓰촨요리(Sichuan Cuisine)’라는 장르로 전 세계에 퍼졌다. 특히 단단멘은 맛있고, 싸고, 간편하고, 마성의 중독성으로, 1990~2000년대 중국의 경제 개방과 함께 전 세계 차이나타운 여기 저기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미국, 일본, 타이완 등지로 퍼져 나간 단단멘은 어느새 달달한 땅콩버터 소스를 입고, 간장과 마늘 소스를 부드럽게 믹스한 퓨전 스타일로 변주되어 글로벌 입맛을 사로잡았다.

옛날 쓰촨의 면 장수 아저씨가 장대 지게를 메고, 양쪽 바구니에 국수와 소스를 담아 즉석에서 비벼 팔던 서민 음식 단단멘이, 이제는 전 세계인들을 홀린 월드 클래스 면 요리가 된 것이다.


홍콩 코즈웨이 베이의 란퐁(兰芳) 거리에는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이라는 유명한 쓰촨요리 식당이 있다. 이 식당이 유명해진 이유는 요리의 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1978년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의 결투 장면을 이 식당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50년 가까이 운영된 이 식당의 유명한 메뉴 중 하나는 단연 단단멘이다.

레스토랑 외관은 중국 전통 건축 스타일에 홍콩식 네온 간판을 얹어, 비주얼만으로도 홍콩홍콩한 갬성이 폭발한다. 내부는 중국식 인테리어와 중국식 샹들리에로 꾸몄다. 유명한 식당인 만큼 이미 많은 외국인이 중국식 원탁에서 쓰촨 음식을 즐기는 저녁. 나는 혼자였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뻘쭘한 표정으로 단단멘 딱 한 그릇만 주문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거나한 요리가 아니라 단단멘 한 그릇만 주문한 게 미안했는데, 그런데도 매니저가 극진하게 대접을 해준다.

따뜻한 차와 물수건을 정성스럽게 챙겨주고, 단단멘 한 그릇도 밑접시에 고이 올려준다.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의 결투 장면을 찍었던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의 결투 장면을 찍었던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식당의 고풍스러운 등 장식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식당의 고풍스러운 등 장식

중국 본토를 세 달여 동안 떠돌다가, 홍콩이 마지막 여행지였기 때문에 나는 이미 갖가지 중국 면 요리를 섭렵한 상태였다. 청두와 충칭 등 쓰촨성에서만 보름 이상 머물렀기 때문에 혈중 마라 농도도 이미 높을 대로 높은 편이다. 게다가 미친 면덕후인 나는 거의 모든 끼니를 면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나름 누들 마스터가 돼있었 다. 하지만 홍콩 버전의 단단멘이 궁금해서 주문한 레드 페퍼 레스토랑의 단단멘은 중국 본토에서 경험한 면 이상의 강렬함을 남긴다. 중국식이 아닌 완전 글로벌 식으로.

중국 단단멘은 거의 국물이 없는 비빔면 계열이다. 하지만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의 단단멘은 뻘건 국물이 흥건한 스타일에 면발도 노란빛이 살짝 도는 얇은 달걀 면이다. 나는 매운맛에 특화된 인간이라 웬만한 매운맛에 면역이 되어 있긴 하다.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이 쓰촨요리 전문점이고, 국물도 시뻘건 비주얼이라 입술이 얼얼해질 각오를 했지만, 국물 한 모금 마시고는 코웃음이 퐁~ 나온다. 이게 바로 글로벌용 ‘순한 맛’ 단단멘이구나! 홍콩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국제적인 도시이고, 여기는 각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요만큼만 매워도 저세상 텐션으로 맵찔이들도 즐길 수 있고 쓰촨요리에 낄 수 있는 맵기일 수도 있겠다.

몹시 귀여운 수준의 맵기지만, 고소한 땅콩 소스와 고추기름 국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면발에도 간이 딱 잘 배어들어 있고, 고급 라면처럼 감칠맛이 폭발한다. 이런 국물이라면 본토의 굵은 면발보다는, 홍콩식의 얇은 달걀면이 더 정답이다. 그렇게 단단멘 한 그릇을 천천히, 그리고 행복하게 비우고는, 다시 홍콩의 반짝이는 골목 속을 어슬렁거린다.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의 귀여운 매운맛 단단멘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의 귀여운 매운맛 단단멘

그로부터 얼마 후, 팬데믹이 시작되고, 2020년 12월 레드 페퍼 레스토랑도 결국 문을 닫았다는 씁쓸한 소식이 들렸다. 5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킨 맛집도 코로나 앞에선 무력했나 보다.

그 옆 ‘골드핀치 레스토랑(Goldfinch Restaurant)’도 홍콩영화 <화양연화>와 <2046>의 배경으로 유명했지만, 당시에도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 홍콩영화에 빠져 살던 내 마음 한구석도 조용히 문을 닫는 느낌이었다. 추억을 품은 레스토랑이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내기억도 조금씩 빛이 바래지는 것 같다.

네온사인이 멋졌던, 그러나 지금은 없어진 홍콩의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식당
네온사인이 멋졌던, 그러나 지금은 없어진 홍콩의 '더 레드 페퍼 레스토랑(The Red Pepper Restaurant)'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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