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제국 소비에트의 그림자 「임페리움(Imperium)」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이어 두번째 소개하는 카푸친스키의 책 「임페리움(Imperium)」. 여섯 개의 시간대를 관통하며 6만킬로미터 이상의 대지를 온몸으로 통과한 긴 여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모스크바의 흑연빛 겨울 공기와 투르크메니스탄 카라쿰 사막의 열풍, 콜리마 강 얼음 위를 가로지르는 극지의 칼바람까지
"나는 다만 걷고, 보고, 기록한다. 제국은 거대한 바다와 같아 한 줌도 손에 쥐기 어렵다"
이 문장을 남겼을때 그는 모든 여정을 끝낸 뒤였다.
전쟁이 남긴 질문
"왜 거대한 기계는 이토록 많은 사람을 짓밟는가?"
가난한 가정의 장남이었던 그는 석유 램프 불빛 아래 신문 조각을 오려 스크랩북을 만들었고, 헌 종이에 빼곡히 적은 메모는 첫 기자 수첩이 된다. 토굴같은 부엌에 어머니가 끓여 주신 비트 스프의 냄새를 맡으며 그는 체제의 역학을 되뇌이게 되었다. 잘린 전깃줄처럼 떨리던 불안은 호기심으로 변했다.
열여덟이 되어 대학 강의실 대신 동방 국경을 따라 놓여진 철로에 몸을 실게된다. 붉은 별이 그려진 객차가 영하30도의 칠흑같은 동토를 달릴 때, 그의 노트기록은 시작되었다. 이후의 이라크 전선, 앙골라 사바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도 기록은 계속되었다.
붕괴의 현장을 걷다
광산도시 보르쿠타
1989년과 1991년 사이 그의 기록은 콘크리트가 갈라지는 굉음이 들려오는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기이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활주로 위를 덮은 적갈색 스모그를 들이마시고, 구빈스코예 시장 앞 끝없는 빵 줄에 합류해 장시간을 서있는 사람들의 탄식 섞인 목소리 들을 메모한다. 그날 밤 첫 목적지인 북극해가 내려다 보이는 광산 도시 보르쿠타로 향한다. 영하 40도의 어둠 속, 전구하나 없는 폐갱앞에서 퇴직 광부들이 철제 양동이에 차를 끓이는 모습을 발견한다. "국가는 이제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부들의 중얼거림을 듣고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제국이 잊힌 자들의 체온으로 연명하고 있다"
동쪽 끝 마가단
모래폭풍 속 중앙아시아
그 뒤의 여정은 다시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면화 가루가 흰 안개처럼 떠도는 타슈켄트 외곽 집산지. 그 곳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손바닥마다 굳은살이 겹겹이 박혀 있다. 그 굳은살 사이로 소금과 땀이 어우러져 이내 증발하지만, 남은 얼룩은 황사처럼 얼굴을 덮고있다. 카푸친스키는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이 먼지를 키운 것은 누구인가?"
그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먼지 낀 거울 이었다고 한다.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과 복종을 강요받은 수백 개의 얼굴이 그의 시선을 반사하며, 내부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균열을 조용히 증언하든 대목이다.
사막과 메마른 바다
사막과 강물의 전쟁
중앙아시아에 이르러, 그는 온몸으로 "사막과 강물의 전쟁"을 듣기 시작한다. 우즈베키스탄 북서부 누쿠스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를 맞이한 것은 송진 냄새도, 향신료 냄새도 아닌 짠내가 섞인 먼지였다.
"이 땅에서 가장 값비싼 건 면화가 아니라 물"
카라쿰 운하와 아무다리야 강둑을 따라 자리한 펌프장을 보고는 파이프오르간에 비유한다. 스탈린이 주도했던 대숙청이 이슬람 율법학자와 타지크 지식인들을 쓸어 버린 뒤에, 흐루쇼프는 불도저로 초원으 고르고 러시아화 된 엘리트들을 주지사를 겸한 대농장장으로 심었다고 한다. 거기에 브레즈네프 시대가 면화(백색 금) 모노컬러를 강요하면서 또 하나의 지층을 덮게 된다.
카푸치스키는 무라브 농장에서 피로한 채 웃는 타직 여공에게서 하루 40kg씩 따야 받는 보너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보다 흙이 피를 먿저 뱉는다"는 표현을 한다.
모이나크 선착장에 서서
트루크메니스탄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의 사막 한복판 모이나크(Moynaq) 선착장 자리에 선다. 지도에는 여전히 '바다'로 표기된 곳이지만 그 앞에는 끝없이 하얀 소금 평원이 펼쳐져 있다. 녹슨 트롤선이 마치 고래처럼 모래 위에 뒤집혀 있다. 로컬 가이드 바흐티요르는 "60년대 6만8천 km²였던 바다가 이제 1만7천 km²도 안 남았다" 고 설명하며, 사막 바닥을 일렁이는 신기루를 가리킨다. 카푸친스키는 배 바닥에 남아 있던 물때를 손 끝으로 긁어 흩날리면 한 줄을 남긴다.
"사람이 바다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너지는 제국과 남은 인간
임페리움이 서사적인 책으로 빛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취재 대상 위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것을 마다한다. 그저 고요히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는 순간이 페이지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붕괴 직전 트빌리시 시청 앞 광장에서 날아든 유탄 파편을 피해 허겁지겁 몸을 숨기던 기자들 틈에서, 머리보다 큰 보따리를 안고 걷는 일곱살 난민 소녀늘 발견한다. 소녀는 "집에 가고 싶어요"를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었고, 그는 양팔로 아이를 품에 아는다. 아이는 차가운 굳은 손가락으로 그의 기자증을 만지작거리며 "이 배지는 우리를 지켜 주나요?" 라고 묻는다. 그는 그 순간을 "제국의 허무를 뚫고 나온 가장 작은 질문"이라 적는다.
잃어버리 기억의 드로호비치
드로호비치의 구불구불한 코블스톤 골목에서 책은 감정의 절정 맞는다. 폴란드계 유대인 작가이자 화가였던 브루노 슐츠의 잃어버린 벽화를 찾아, 우크라이나 국경에 속한 작은 도시 드로호비치를 종일 헤메고 다닌다.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이 뒤엉켜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흩어지는 그 찰나에 섬광같은 생각이 스친다
"도시도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다"
기억은 건물과 거리 사이를 떠돌다 결국 인간의 마음으로 귀속된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이 가슴을 타고 지나간다.
카푸친스키의 서사속 여정
임페리움은 결국 개인의 여행기이다. 과거 제국의 페허를 더듬는 그 발걸음속에서 청년 시절 잃어버린 호기심을 찾게 되고, 붕괴와 재건이 교차하는 순간에서만 나타나는 희미한 빛을 목격한다. 카푸친스키가 그랬듯, 지도 한구석을 지목해 손가락으로 따라가 본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임페리움은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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