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에 담긴 스페인: 『Grape, Olive, Pig』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사랑은 곧 스페인 전역을 누비는 미식의 흐름이 되어버린다. Matt Goulding의 『Grape, Olive, Pig: Deep Travels Through Spain's Food Culture』는 스페인 요리에 대한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음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스페인의 문화를 탐색하는 에세이이자,이 땅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과 풍경,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한 접시에 담긴 스페인: 『Grape, Olive, Pig』

"The best meals don’t come with instructions; they come with stories." – Matt Goulding, Grape, Olive, Pig
"가장 훌륭한 식사는 조리법과 함께 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이야기를 품고 있다." – 맷 굴딩, 『포도, 올리브, 돼지』

이 한 문장에 이끌려 책을 펼쳤다. '음식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한 진실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이미 이 여정에 동행하고 있다.

음식이라는 언어로 읽는 스페인

스페인은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살과 땅의 향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나라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삶의 철학이자 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Goulding은 말한다. 

"In Spain, meals don’t end when the plates are cleared; they begin."
"스페인에서는 식사가 끝나도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는 단순한 맛집 탐방을 벗어나, 요리의 배경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도시와 시골, 바다와 산,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스페인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음식은 단순히 재료의 조합이 아니라, 시간과 정서,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말 그대로 '씹고 삼키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음미하는' 체험이다.

바르셀로나: 사랑의 도시, 타파스의 도시

시작은 바르셀로나였다. 저자가 처음으로 스페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 도시의 삶에 스며든 곳. 그는 작은 타파스 바에서부터 세계적인 모더니스트 셰프들이 모인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바르셀로나의 다양한 얼굴을 소개하고 있다.

"Tapas aren’t just small plates; they’re big conversations."
"타파스는 단순한 작은 접시 요리가 아니다. 그것은 커다란 대화다."

라 람블라 거리에서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식당은 피하라고 조언하면서도, 뒷골목에서 정체불명의 소스를 얹은 작은 감자 요리 하나가 얼마나 큰 위안을 줄 수 있는지를 조용히 이야기한다.

여행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나 향기에 이끌려 들어간 적이 있을 것이다. 음식보다 그 공간의 따뜻함에서 위안을 더 많이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는 맛보다 '사람'이 먼저였고, 접시는 그 연결의 도구일 뿐이었다.

갈리시아: 바다의 분노와 삶의 고요

스페인 북서쪽, 갈리시아 해안선에서 거위목 따개비(percebes)를 채취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이 책의 모든 미덕이 담겨 있다. 3명의 자매가 매서운 파도와 싸우며 암석 위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스페인 음식 문화의 진실을 말해준다.

"You don’t eat a percebe. You worship it."
"너는 따개비를 먹는 게 아니다.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는 이 단 한 가지 이야기에 무려 8,000단어를 할애하고 있다. 맛보다 깊은 이야기, 풍미보다 더 진한 삶의 흔적. 그것이 Goulding이 추구하는 음식의 본질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고단한 노동과 헌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식재료 하나에도 생명이 있고, 누군가의 투쟁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 따개비는 더 이상 해산물이 아니라 삶의 잔존물처럼 느껴진다.

아스투리아스: 바다와 산이 만나는 경계에서

아스투리아스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스쳐 지나가는 지역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Goulding은 산속 동굴에서 숙성된 치즈와 사이다 하우스의 문화, 그리고 파바다(Fabada)라 불리는 콩 스튜의 깊은 풍미를 발견한다.

"In Asturias, the sea and the mountain speak the same dialect."
"아스투리아스에서는 바다와 산이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

책에서 묘사하는 아스투리아스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서정시 같게 느껴진다. 해 질 무렵, 절벽 위 사이다 바에서 바라본 해안선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하나의 깨달음으로 남게된다.

아직 가본 적 없는 그곳이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절로 치즈 냄새와 파도의 향이 느껴졌다. 먹는다는 것은 곧 어떤 공간의 공기와 분위기를 흡수하는 일임을 실감했다.

살라망카와 하몽, 도토리 향이 나는 고기의 진실

하몽(Jamón)은 스페인의 자부심이며, 제사이고,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이곳 살라망카 지역의 하몽은 도토리를 먹고 자란 이베리코 흑돼지로 만든다고 한다.

"They don’t slaughter pigs; they sculpt ham."
"그들은 돼지를 도살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몽을 조각한다."

하몽을 이해한다는 것은 스페인의 농업, 경제, 전통, 그리고 가족이라는 개념까지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Goulding은 이를 가감 없이 풀어내고 있다.

고기 한 점에도 철학이 배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만드는 건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긴 시간의 정성과 자연과의 대화이다. 도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숭고하게 다가왔던 적은 없을 것이다.

바스크 지방, 불의 셰프들과 혁신의 불꽃

바스크 지방의 산 세바스티안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레스토랑이 몰려 있는 도시다. 그는 이곳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Extebarri를 방문하며, 불 하나로 음식을 혁명하는 셰프 Bittor Arguinzoniz의 철학을 소개한다.

"He doesn’t cook with fire; he converses with it."
"그는 불로 요리하지 않는다. 그는 불과 대화한다."

그릴이라는 단순한 도구에서 광채를 만들어내는 그의 손길은 스페인 요리의 창의성과 장인정신을 보여준다.

불과의 대화라니. 이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한 점의 연기가 수십 년의 기술로 다듬어질 수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요리란 예술이자 철학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르게 한다.

소브레메사(Sobremesa),식사 후의 여운

스페인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식사 후에 시작된다. 이 시간을 스페인 사람들은 '소브레메사'라 부른다.

"Sobremesa is not an afterthought; it’s the soul of the meal."
"소브레메사는 식사의 끝자락이 아니라 그 식사의 영혼이다."

이 문화를 스페인인들의 공동체 정신, 여유, 그리고 삶의 속도에 대한 철학으로 조명한다.

식사를 마치고도 자리를 지키는 그들의 태도 속에는 상대방을 향한 깊은 존중이 있었다. 음식이 끝난 후의 시간까지도 하나의 축제처럼 즐길 수 있다는 그 여유가 부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음식은 여행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Grape, Olive, Pig』는 책은 스페인을 여행하지 않고도 그 나라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는 통로이다.

"To truly understand a place, you must eat its food. To truly taste its food, you must understand its people."
"한 장소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곳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음식을 진정으로 맛보려면, 그곳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말한 대로, 음식은 나라의 얼굴이자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새로운 여행을 앞둔 이라면 지도를 펴기 전에 먼저 식탁 위를 살펴야 한다.

책장을 덮고 난 뒤의 여운

『Grape, Olive, Pig』는 스페인을 향한 미식가의 헌사이자, 음식에 깃든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작가의 시선이 담긴 책이다. 요리책도, 여행서도, 르포르타주도 아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제 여행 계획을 짤 때 맛집 검색보다 먼저 그 지역의 재료와 식문화부터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갈리시아의 절벽 위에서 따개비를 채취하는 세 자매를 만나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소망도 품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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