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진짜 안내자, Bradt Travel Guides를 펼치며
노선을 따라가는 여행에는 익숙함이 있다. 어디를 가도 이미 누군가의 발자국이 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검증된 코스’에 의지한다. 하지만 여행은 때로 길을 잃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Bradt Travel Guides 같은 존재가 있다. 마치 거친 사막 한가운데서 나침반을 꺼내 드는 듯한 감각. 이 시리즈는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지역, 갈등과 상처의 그림자가 짙은 공간, 혹은 누구의 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은 마을들을 품는다.
'처음'의 순간을 기록한 가이드북
Bradt의 가이드북을 처음 접한 건, 아프리카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타 여행 출판사들이 스쳐 지나간 모잠비크에 대해, Bradt는 전쟁 이후의 변화된 풍경과 복잡한 역사,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꼼꼼히 담아냈다. 일종의 ‘현지의 기억 저장소’ 같다고나 할까.
흥미로운 점은 Bradt가 실제로 그 지역에 대한 ‘최초의’ 영어 가이드북을 썼다는 점이다. 마다가스카르, 우간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보스니아까지. 여행 출판사라기보다는 지리적·문화적 기록자라는 인상까지 준다. 누군가에겐 너무 이르거나 위험할 수 있는 순간을, Bradt는 오히려 그 ‘초입의 공기’로 포착한다. 이건 단순히 빠르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이목이 닿기 전, 그 땅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건, 사려 깊음과 열정을 전제로 한 일이다.
Bradt만의 시선, 그리고 저자들의 깊이
Bradt의 또 다른 독특함은 ‘누가’ 쓰느냐에 있다. 수많은 가이드북들이 편집자 중심의 템플릿 기반으로 작성되지만, Bradt는 철저히 저자 중심이다. 보스니아 가이드북은 실제로 그 땅에서 20년 이상 살아온 전문가가 썼다고 한다. 그의 문장은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마치 조용한 대화처럼 다가왔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의료 챕터를 의사와 협업해 작성한다는 점. 세계 곳곳을 여행한 의사 Jane Wilson-Howarth가 참여한 건강 정보는 신뢰감을 넘어, 독자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로 느껴졌다. 단순히 어디를 조심하라는 문장이 아니라, 그 나라의 보건 시스템과 접종 정보, 위생 수준까지 구체적으로 다뤄주니, 이건 거의 여행자를 위한 생존 매뉴얼에 가깝다.
풍경을 넘어 삶을 걷게 하는 책
가장 최근에 접한 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편이었다. 사라예보의 골목을 소개하면서 단순히 ‘어디를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골목은 전쟁 전에는 시장이었고, 지금도 낡은 간판 너머로 그 기억이 스민다”
여행자는 이 문장을 읽고 길을 걸으며, 단지 위치가 아닌 ‘시간’을 걷게 된다.
그런 점에서 Bradt는 풍경을 넘어서 ‘삶의 결’을 걷게 만드는 책이다. 모스타르의 다리에선 재건된 콘크리트가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질라브카 한 잔을 들고 다리 위에 발을 올려보라”는 문장을 만날 때, 단순한 가이드는 이미 에세이가 되어 있다.
지도 하나에도 배려와 디테일이
다섯번째 판형으로 업데이트된 보스니아 편에는 각 도시별로 새로운 지도들이 추가됐다. 사라예보의 트램 노선은 물론, 우나 국립공원의 하이킹 루트까지. 중요한 건 이 지도가 단순한 안내 기능을 넘는다는 점이다. 지도가 설명하는 루트는 수치가 아니라 경험이다. “이 길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과도 함께 걷기 좋다”거나 “해가 지는 시각에 걸으면 빛이 숲을 뚫고 들어온다”는 식이다.
Via Dinarica 트레일에 대한 소개는 특히 인상 깊었다. 마치 한 명의 여행자가 자신의 등산 기록을 고백하듯, 솔직하고 정직했다. 이 루트는 가족 여행자부터 진지한 트레커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코스 정보’ 그 이상이었다.
관광지를 넘는 이야기의 깊이
Bradt의 가장 큰 미덕은, ‘비주류’라는 타이틀을 로맨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알바니아나 코소보에 대한 챕터에서는, 해당 지역이 지닌 역사적 배경이나 갈등의 흔적, 그리고 그 속에서 재생되는 일상에 주목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정치 문제나 사회적 긴장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환대를 조명한다.
이러한 균형감은 '객관적인 정보' 그 이상을 만들어낸다. 어떤 장소가 단순히 ‘덜 유명하다’는 이유로 낭만화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의 눈을 성장시키는 진짜 정보다.
슬로우 트래블 시리즈 '머무는 여행'
Bradt는 영국 내 지역을 대상으로 한 ‘슬로우 트래블’ 시리즈도 운영 중인데, 이건 마치 ‘관계 맺는 여행법’에 가깝다. 데번,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 슈롭셔 등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 직접 쓴 이 가이드들은, 대형 가이드북에선 찾을 수 없는 개인적인 시선이 돋보인다. 동네 작은 서점, 버스 노선, 주말 장터 같은 생활의 결들을 여행자의 언어로 풀어낸다.
도시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장소에 조용히 오래 머무는 방식. 그 안에서 계절을 느끼고, 현지인의 일상에 발끝이라도 닿아보려는 태도. 슬로우 트래블은 단순히 느린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가 아닌 ‘깊이’의 문제다.
왜 Bradt Travel Guides인가
여행서적은 이미 넘쳐난다. 비슷한 종류의 책도 리뷰한게 10여권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도 Bradt 가이드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로 느껴진다. 왜일까? 아마도 이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어디에 가라’가 아니라 ‘어떻게 보라’를 이야기한다. 목적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이야기들을 함께 느끼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사실 이 가이드북은 더 이상 ‘가이드’만은 아니다. 때로는 기록이고, 때로는 에세이고, 때로는 다큐멘터리다. 그래서 Bradt는 진짜 여행자에게 더 잘 맞는다. 지도 위를 넘어 기억의 지형을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길이 덜 알려졌을지라도, 그 안에서 마주할 ‘삶의 얼굴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We get there first, and we go deeper.” – Bradt Travel Guides의 철학이, 오늘 내 배낭 안에서도 조용히 무게를 더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