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자』 정체성을 잃은 시대, 도시에서 나를 찾다
도쿄는 내게 늘 이중적인 인상을 주는 도시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화려하면서도 공허한 그 도시. 그러던 어느 날, 강상중 교수의 『도쿄 산책자』를 접하면서 나는 마치 안개 속 풍경이 선명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도시의 골목마다, 거리의 표정마다 녹아 있는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잊고 있었던 여행의 진짜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이방인으로 도쿄를 걷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문장이 있다.
“도쿄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상경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언제까지고 스트레인저, 그런 기분입니다.”
이 말은 나의 여행 경험을 통째로 대변하는 듯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 나에게 이 말은 묘한 위로가 되었다. 강상중 교수는 도쿄를 그저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도시와 부딪히며,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으로 도쿄의 속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나는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따라 걸으며, 내가 지나쳐온 장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장소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
『도쿄 산책자』는 장소마다 고유한 질문을 던진다. 메이지신궁에서 “마음의 성역”이라는 주제로, 현대인이 신성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묻는다.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청명한 공기와 경건한 분위기는 단지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해 그 감각 뒤에 깃든 수백 년의 시간과 사람들의 기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포시즌스 호텔이나 국립신미술관, 도쿄증권거래소 같은 공간에서도 저자는 일반적인 정보 보다는 사유를 끌어내고 있다. 도시가 소비와 생산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의 도시
롯폰기힐스를 가리켜 ‘도시의 바벨탑’이라 표현한다. 초고층 빌딩과 복합 문화 공간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얼굴을 비추어 본다. “대서사의 종언”이라는 개념을 꺼내 들며, 도시의 가치는 더 이상 단일한 서사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과거 롯폰기에서 바라본 도쿄 야경이 떠올리게 만든다. 황홀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장면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어떤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책에서는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품은 거리, 그리고 책
책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진보초 고서점 거리이이다. 오래된 책 냄새와 빽빽한 서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 이 거리를 “지식의 기억이 숨 쉬는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책은 단지 종이 뭉치가 아니라, 시대의 정서를 담은 기억의 그릇이 되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도시의 가치는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그의 말은, 서울의 낡은 골목들을 아껴 걷는 내 습관과도 통하고 있다.
야나카, 네즈, 센다기. 이른바 야네센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내게도 특별한 곳이었다. 몇 해 전, 별다른 목적 없이 그곳을 걷다가 마주친 작은 찻집, 허름한 사찰, 오래된 골목들. 그 풍경들이 이 책에서는 '기억의 틈새'로 되살아난다. 도시 재생의 명분으로 철거되고 있는 수많은 골목이 떠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기억을 지워내고, 새로움으로 치장하는 걸까.
도시의 외곽에서 만난 인간
아키하바라, 고양이 카페, 산야. 이들 장소는 도쿄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도시의 본질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인다. 사람들의 외로움과, 탈욕망화, 빈곤과 고령화 같은 문제들이 이곳에서 생생히 드러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고양이 카페를 경험했던 날을 떠올려 본다. 귀여운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내 안에 느껴졌던 쓸쓸함. 그것은 단지 동물의 위안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부재를 대신하는 풍경이었다. 책에서는 이런 일상을 철학의 언어로 번역해내고 있다. 그 덕분 인지 나 자신의 감정도 새롭게 읽을 수 있었다.
자유로운 도시를 상상하며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묻는다. “도시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가.” 정치, 사법, 자연과 인간의 교차점에서 그는 자유의 조건을 탐색한다. 국회의사당, 최고재판소, 스미다가와, 쓰키지 시장. 각각의 장소에서 그는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되었다. 도시는 편리함과 풍요를 준다. 하지만 동시에 감시와 통제, 과잉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점점 ‘관찰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을까.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익숙한 공간 속에 낯선 질문이 숨어 있고, 그 질문은 때로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진실과 닿아 있다. 책은 그 물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해준다.
다시 도쿄를 그린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도쿄가 그리워진다. 카메라 대신 메모킷을 들고, 가이드북 대신에 책의 문장을 되새기며 걷고 싶어진다. 어떤 장소가 아닌, 어떤 감정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 것이다. 도시의 풍경 속에서 건져 올린 수많은 인사이트들은, 여행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 모두 어느 도시에서건 ‘스트레인저’다. 그리고 그 낯섦 속에서야 비로소 도시의 진짜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의 공간이자, 기억의 도시이며,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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