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물: 사라진 유럽을 걷는다는 것의 의미

"아직 나는 걷고 있다. 강둑은 하얗고, 나무들은 얼어붙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문장은 파트릭 리 퍼머(Patrick Leigh Fermor)의 책 『시간의 선물(A Time of Gifts)』 중 한 구절이다. 그의 여행은 유럽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세계대전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겨울을 통과한 한 기록이다. 그는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걷지만, 책을 읽는이는 그가 지나친 마을과 도시가 곧 전쟁에 삼켜질 운명임을 미리 알고 있다. 이 ‘시간 차이’가 책 전체에 절절한 감정을 부여하고 있다.

시간의 선물: 사라진 유럽을 걷는다는 것의 의미


한겨울 유럽을 걷는 청년

1933년 겨울, 런던의 안개 낀 거리에서 출발한 18세의 청년 퍼머는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새로운 세상의 경계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의 목적지는 유럽 대륙의 동쪽 끝, 그리스도교 문명의 오래된 교차점인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이다.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고, 누군가의 명령도 아니었지만, 그는 삶의 의문들로 가득 찬 청춘의 충동으로 길 위에 서게된다.

출발지는 네덜란드의 호크(Hook of Holland).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바지선을 타고 템스 강 하구를 따라 내려가며 유럽 본토에 첫 발을 내딛는다.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은 아직 멀었고, 앞에는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와 안개, 얼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퍼머는 라인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독일의 전통적인 목조 도시들, 오스트리아의 황실 유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설원, 그리고 헝가리 평원의 언어도 풍경도 낯선 땅들을 순례하듯 지나간다. 

풍차 옆을 스케이트 타며 달리는 네덜란드 아이들에게 감탄하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직후의 독일 맥주홀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편한 예감을 감지하기도 한다. 퍼머는 단순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길 위에 서려 있는 사람들의 삶, 건물에 깃든 시간, 풍경 속에 숨겨진 역사를 채집한 것이다.

청년의 눈으로 본 잃어버린 유럽

책의 백미는 단연코 그가 지나친 유럽 도시들에 대한 섬세하고도 생생한 묘사이다. 퍼머는 각 도시를 단순히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그는 그 도시의 공기, 소리, 냄새, 계절의 흐름까지 자신의 감각 전체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도시의 고유한 호흡 속으로 침투시킨다.

잘츠부르크의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성의 기와마다 눈이 앉았고, 거리의 조약돌은 마치 유리처럼 반짝인다”고 적는다. 그 거리를 걷던 제국 시대의 귀족들, 카톨릭 예식이 울려 퍼졌던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눈발 속을 지나던 이름 모를 장인의 그림자까지 머릿속에 불러내고 있다.

비엔나에서는 고풍스런 음악이 새어나오는 창가에 기대어 황실의 잔영을 느끼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넘어가 프라하의 눈 덮인 골목길에서는 “과거의 시인들이 여전히 속삭이고 있는 듯한” 울림을 느낀다.

기억과 회고가 만들어낸 문학적 깊이

책은 여행 당시의 기록이 아니다. 퍼머가 여행 후 40년이 지나, 62세의 나이에 집필한 것이라고 한다. 그간의 기억, 메모, 그리고 루마니아의 성에서 발견된 여행 일기가 책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여행 당시의 회고의 깊이를 담아 내고 있다. 젊은 시절의 충동과 노년의 성찰이 함께 뒤섞여 있다. 어떤 문장은 눈 내리는 마을을 처음 본 18세의 놀람으로 가득하지만, 다음 문장은 “이 골목을 지나던 기사단의 말발굽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며 역사적인 배경을 덧입히고 있다.

이중적 시선은 책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의미를 지금의 시점에서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온기

어린시절 감행한 여행은 그 자체 만으로 고독한 행위였다. 여행 초기에 가지고 있던 소지품을 도난당한 이후, 거의 무일푼에 가까운 상태로 대륙을 횡단하게 된다. 추운 헛간에서 바닥에 깔린 짚더미 위에 웅크려 잠을 청하고, 장작불 하나 없는 헛간 안에서 자신의 숨결로 추위를 견디며 새벽을 기다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는 손짓과 표정,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린 작은 스케치를 팔거나 보여주며 식량을 얻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접고, 배고픔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정에는 늘 ‘낯선 이의 손길’이 존재했다. 길을 잃고 눈 속을 헤맬 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농가에서 주저하며 문을 두드리면, 굳은 얼굴로 문을 연 농부는 이내 따뜻한 난로 옆으로 그를 앉히곤 했다.

“나는 나의 두 다리로만 걷지 않았다. 이 여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 위에 걸쳐 있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여행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신뢰와 연대에 대한 선언처럼 읽히고 있다.

유럽을 가로지른 강을 건넌 시선

책의 제목 『시간의 선물』은 루이스 맥니스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히틀러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던 시대, 고대 왕국들의 마지막 잔재가 깃든 유럽을 걷는 한 청년의 여행은 읽는이에게 과거를 상상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구절은 책 전반에 흐르는 감정을 요약한다.

“강은 변하지 않았고, 도시들은 허물어졌지만, 돌 속에 남은 노래는 여전히 들린다.” 

미학적 서술의 정점

퍼머의 문장은 단순히 사실을 마치 하나의 풍경화나 교향곡을 체험하듯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는 말의 배열과 어휘의 선택을 통해 장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공간의 질감과 시간의 흐름까지 언어로 그려낸다.

고딕 성당의 첨탑을 묘사하며, “돌은 바람을 향해 뻗어 나가고, 창문은 하늘을 향해 열린다”고 적는다. 그는 눈송이를 묘사하며 “하늘이 종이 조각을 흘리듯 부드럽게 눈을 뿌린다”고 쓰기도 하고, “내 숨소리가 마을의 종소리와 섞인다”고 묘사한다.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오마주

책은 역설적으로 ‘시간이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가 지나간 많은 도시들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머물렀던 귀족의 성들은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무너졌으며, 만난 사람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이 존재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다.” 

과거를 단지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현시대의 독자에게 ‘다시 체험’시키고자 한다.


걷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책은 한 시대의 풍경을 담아낸 역사적 초상화이자, 이제는 사라지거나 잊혀진 유럽 문명에 대한 애틋한 예의와도 같은 작별 인사이다.

퍼머가 걸었던 그 유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도시와 성, 사람들과 관습은 전쟁과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자취를 감췄지만, 그의 문장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결국 독자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풍경 속에서도 잃어버린 세계의 잔향을 찾게 만드는 일종의 기억 장치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어떤 기억은 문장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걷는 책’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자신의 발 아래, 조용히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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