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누구의 것인가, 『Airplane Mode』 경계의 여행학

불 꺼진 기내에서 불현듯 켜지는 화면 속 지도가 있다. 그 위에 흐르는 궤적은 단순한 비행 경로가 아니라, ‘누가 이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세계의 답이다. 샤나즈 하비브(Shahnaz Habib)의 『Airplane Mode: Travels in the Ruins of Tourism』는 이 묵직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책 속에는 여행이라는 말에 깃든 역사, 편견, 그리고 기쁨의 궤적을 따라가며, 여권과 지도, 가이드북, 꽃, 그리고 회전목마 같은 ‘여행의 유물’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여행은 누구의 것인가, 『Airplane Mode』 경계의 여행학


이동의 조건: 여권이라는 이름의 필터

하비브가 가장 먼저 겨냥한 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하는 '여권'이다. 인도 케랄라에서 태어나 뉴욕에 거주하는 그녀는, 인도 여권을 들고 세계를 여행하며 마주친 벽들을 담담하면서도 예리하게 기록한다.

“여권은 국가가 허락한 기쁨의 증표다. 누구는 들고, 누구는 기다린다.”

이 문장은 단지 서류 한 장의 무게를 넘어, 피부색과 출신 국가가 이동의 조건을 결정짓는 현실을 정조준한다. 그녀가 겪은 비자 거절, 무기한 대기, 취소된 비행편의 기억은 단순한 불편함을 비롯해, 구조적 차별이 어떻게 우리의 이동을 통제하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 된다. 여권은 더 이상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그려놓은 경계의 지도인 것이다.

단지 '그 나라의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출국장에서 추가 심사를 받는 사례들을 본다면 『Airplane Mode』는 이런 현실이 단지 예외가 아니라 구조임을, 통계를 넘어선 서사로 증명해낸다.

가이드북, 그 은밀한 식민의 언어

터키 코냐에서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A Guidebook in Konya』 장에서 하비브는 가이드북이라는 여행 도구에 내재된 세계관을 해부한다. "가이드북은 누가 썼고, 누구를 위해 쓰였는가?"라는 질문은 여행의 시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되묻는다. 유럽 중심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공간, 그 안에서 지역민은 배경일 뿐이다.

회전목마와 부겐베리아

회전목마. 어린 시절 놀이공원의 추억을 소환하는 이 친숙한 기구가 사실은 유럽 제국주의 박람회의 전시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오래된 동화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동그랗게 돌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그 바퀴는 식민의 논리로 조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겐베리아 꽃—뜨거운 햇살 아래 피어 있는 그 찬란한 꽃은, 하비브의 말처럼 식민 통치자가 점령지를 자신들의 미적 기준으로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이식한 유럽의 잔상이다.

이처럼 책에서는 일상에 스며든 사물 하나하나에 제국의 흔적이 새겨져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대목에서 여행 중 찍은 사진 속 배경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아름답다고 느낀 풍경들, 꽃과 벽화, 거리 장식은 누구의 미학이었을까? 『Airplane Mode』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사물의 언어’로 바꾸어 읽게 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식민의 언어였던 것이다.

의자 여행자와 아버지의 뉴스 채널

코로나19 시기의 『The Armchair Traveler』 장에서 하비브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전염병으로 국경이 닫히고 항공편이 중단된 시기, 그의 아버지는 CNN 뉴스 채널을 시청하고, 구글 어스를 통해 전 세계 도시의 거리를 유람한다. 단순한 정보 소비가 아니라, 그것은 그에게 ‘여행’ 그 자체였다. 그녀는 말한다. 

“아버지에게 여행은 집 밖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집 안에서 세계를 환기하는 방식이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물리적 이동만이 여행의 본질은 아니라는 진실에 다가간다.

하비브는 이처럼 ‘의자 여행자(armchair traveler)’로서의 삶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감각적 경험과 감정적 거리감을 동시에 해부한다. 이동할 수 없는 이들—노년의 이민자, 장애인, 팬데믹의 고립자—에게 여행은 상상의 훈련이며, 또 다른 방식의 존재 확인이다.

이 장을 읽으며 우리 부모 세대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해외여행이 일상이 아닌 세대에게 뉴스 채널은 창이었고, 다큐멘터리는 여권 없는 여정이다. 하비브는 그런 관점에서 디지털 여행의 ‘비가시적 폭력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지닌 치유력과 상상력을 긍정하게 한다.

왕복 여행, 돌아올 수 없는 귀향

이민자로서 뉴욕에서 살며 인도로 돌아가는 하비브는 ‘왕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복합성을 고찰한다. “이민자의 귀향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아가는 것이다.” 케랄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녀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고, 뉴욕으로 돌아올 때는 또 다른 시간대의 자아와 재회한다.

이 문장은 여러 번 곱씹게 된다.

“뉴욕의 집에 어머니가 가져온 향신료 냄새가 스며드는 순간, 나는 고향을 맛이 아닌 냄새로 기억한다.”

여행이란 결국, 공간보다 시간의 겹침이라는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돌아간다는 건, 더 이상 원래의 자리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이라는 착취적 유흥

이자벨라 버드, 베데커 가이드북, 1950년대 미국 하이웨이 시스템까지, 『Airplane Mode』는 관광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자주 권력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단지 즐기기 위해 방문한 땅이 사실은 누군가의 분절된 삶의 터전이었음을, 관광이 때론 풍경을 착취하는 시선임을 보여준다.

삶의 공간은 인스타그램용 배경이 아니었다. 하비브는 말한다.

“여행은 유쾌함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불편함과 마주하는 윤리다.”

‘기쁨의 저항’이라는 새로운 제안

하비브는 책의 마지막에서 ‘joyful resistance(기쁨의 저항)’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단지 관광지의 명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조차 정치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는 태도다. 마우이섬의 관광 자제 운동, 파타고니아의 환경 복원 프로그램, 이런 실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제안은 여행자의 ‘자세’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어디를 갈 것인가보다, 왜 가는가를 먼저 묻고 있는가? 하비브는 이 질문을 통해 여행을 하나의 행위에서 ‘의식적 실천’으로 재구성하게 한다. 『Airplane Mode』는 그런 여행자의 윤리를 연습하게하는 실험실이 되어준다.

여행과 삶, 그 모든 경계의 지층

『Airplane Mode』는 여행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삶을 이야기한다. 경계와 여권, 식민과 귀향, 관광과 시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묻는 도구다. 책을 덮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여행은 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임을. 그리고 보는 방식이 곧 세계를 만드는 힘임을 알게해준다.

공항의 대기열에서, 낯선 도시의 벤치에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그곳을 보지 않을 것이다. 책은 바로 그 지점을 바꿔놓는다. 여행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책, 그것을 여행자의 필독서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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