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만난 역사의 속삭임 윌리엄 달림플 『진의 도시: 델리에서의 1년(City of Djinns)』

델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대한 역사와 문화의 용광로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먼저 떠오른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더라도, 인도라는 방대한 나라에서 델리는 무수히 많은 전통과 종교, 사건들이 뒤엉켜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골목에서 만난 역사의 속삭임 윌리엄 달림플 『진의 도시: 델리에서의 1년(City of Djinns)』

윌리엄 달림풀(William Dalrymple)의 『진의 도시: 델리에서의 1년(City of Djinns)』은 매혹적인 델리에서의 시간과 발견한 수많은 이야기를 수록한 여행기다. 여행기록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델리의 여러 시대를 오가는 것 같은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왜 하필 델리였는가?

아시아의 대도시 중에는 영혼과 역사의 다층성을 보여주는 곳이 많다. 화려한 관광명소는 물론, 복잡하게 얽혀있는 교통, 현대적인 편리함을 보여주는 신기술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델리는 다른 도시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무굴제국의 흔적부터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자취와 분리독립 이후에 펀자브인과 원주민이었던 '델리 사람들'의 문화 충돌까지, 델리는 '파괴와 재생'이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수없이 거쳐 온 곳이다.

1989년 델리에 도착한 달림풀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25세의 젊은 여행자였다. 그가 직접 선택한 목적지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델리에 발을 디디면 결국 그 도시의 정령들이 당신을 붙든다"라는 말처럼, 어느샌가 그는 도시의 영혼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 도시가 가진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무게가 공기 중에 얇은 막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

달림풀은 며칠간 니자무딘 골목을 헤메다가 낯선 냄새와 소리에 이끌려 옛 시대의 사람들이 속삭이는 환청처럼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오랜 세월과 다양한 문화가 한 데 뒤섞여 있는 델리의 다층적인 정체정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골목길에서 피어난 호기심

책의 제목 '진(Djinn)'이 뜻하는 것은 이슬람 신화에서 불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데, 달림풀은 델리의 정체성을 이 진들과 은유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델리는 진들의 도시이기에, 파괴될 때마다 그들이 재건을 돕는다"

전설은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모티브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도시 전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파괴와 재생'을 겪는 이유를,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돕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오래된 이야기야말로 델리를 더욱 독특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상징이다.

그는 수피 신비주의자나 역사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진에 관한 전설과 의미를 수집한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현대적 합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신화나 혹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울림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혼란스러운 모습 뒤에 감춰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영혼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역사를 뒤집어 읽다

책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통의 역사서는 과거부터 현재로, 여행기는 현재부터 미래로 향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의 도시'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특이한 구성을 택하고 있다.

'현대의 델리 → 무굴 제국 → 고대 인도'의 식으로 시대를 역순으로 따라가고 있다. 델리에서 생활했던 1년간의 일상에 과거를 조사하는 여정이 교차되고, 그가 깊게 파고 들어간 각 시대마다 등장하는 인물과 공간은 전혀 다른 색채를 띠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독자는 책 속에서 무굴 제국 시대의 화려한 건축물과 궁정 문화를 만나고, 그 이전의 고대 신화와 서사시 '마하바라타' 속의 델리를 엿보게 된다.

"이 도시가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역순으로 배치된 이야기들은 이 도시가 언제부터 다채로운 기억들을 쌓아왔는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펀자브 이민자와 진짜 델리 사람들

분리독립 이후, 델리는 대규모 인구 이동과 문화 충돌을 경험한다. 펀자브 지역 출신들이 대거 델리에 이주하면서, 기존 델리 사람들의 전통과 새로운 문화가 강하게 부딪치게 된다. 이 갈등을 '정교한 우르드 문화와 펀자브 문화의 대립'으로 묘사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을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 치부하고, 반대로 이민자들은 기존 도시 시민들을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분리 독립의 상흔이 일으킨 물리적이고 심리적 상처는 책 속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다.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땅에서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의 옛 노래와 말투, 전통이 뒤엉켜 자리를 잃어버렸다"

달림플이 만난 사람들은 분리독립으로 인한 공포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도시는 끊임없이 바뀌어도, 사람 마음에 새겨진 두려움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무굴제국의 황금기와 영국 식민지의 그림자

델리를 이야기 할때 빼놓을 수 없는 무굴(Mughal)제국은 도시의 건축부터 예술,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무굴 시대 건축물이나 궁정생활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달림플은 "건물 하나하나가 걸어다니는 시(詩)라 표현할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무굴제국의 걸작으로 꼽히는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나 붉은 요새(Red Fort)는 거대한 규모와 섬세한 장식으로 당대의 예술적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페르시아의 우아함과 인도 토착 색채가 한 데 어우러진 무굴 제국의 문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예술이었다"

이러 화려함은 영국 식민지시대로 쇠퇴화되기 시작했다. 책에서 언급되는 1857년 인도대반란은 무굴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자, 델리에 스며든 서구 문화의 편린을 각인시키는 계기로 나오고 있다. 영국의 통치 방식과 그 영향이 도시 전역에 퍼지면서, 델리가 더 복합적인 면을 가지게 되었음을 묘사한다. 동시에 "역사는 끊임없이 전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오히려 후퇴하며 오래된 영광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만든다"라고 말하며, 식민 지배가 델리의 역사적 유산을 지워버리지는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머와 학문이 결합된 매력

이 책은 딱딱한 역사서가 아니다. 달림플은 그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델리를 탐험했다. 연구실에만 갇혀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게 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도시를 새롭게 배웠다고 전한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건축물들을 묘사할 때조차, 연대기와 통계로 풀어내지 않는다.

"그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고대와 근대의 접점을 보고 싶었다"

감각적인 언어로 이야기을 끌어가며, 개인적인 체험과 방대한 연구가 어우러진 조합으로 머리로 읽기보다는 온몸으로 느끼는 역사로 인도하고 있다.

여행자가 얻게 될 보물

델리 여행을 계획하거나 아니면 이미 다녀왔다면, 이 책은 도시를 바라보는 시야을 한층 넓혀줄 것이다. 한 낮의 더위 속에서 분주한 시장과 웅장한 유적이 주는 특유의 활기와 색채... 델리의 모든 것이 더욱 풍부해진다.

"델리는 특정 시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시대를 동시에 품고 있다"

달림플의 단언은 현재 발딛고 선 그곳도 사실은 오래된 이야기의 궤적 위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붐비는 거리 이면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진'의 속삭임을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도시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눈에 보이는 요소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한 도시의 불명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진들의 속삭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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